진주성-북관대첩(北關大捷)
진주성-북관대첩(北關大捷)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7.23 16:0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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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
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북관대첩(北關大捷)

임진3대첩 하면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모두가 알고 있지만, 충의공 농포 정문부 선생의 북관대첩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이는 농포 선생이 거둔 북관대첩은 그 무대가 함경도로, 지금은 북한 땅이 되어 남북 교류가 원활이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북에서 발간한 책에는 임진왜란 때 구국의 의병장으로는 ‘북에는 정문부, 남에는 곽재우’라고 칭하며 임진3대첩에 북관대첩을 포함할 정도로 위기의 조국을 구한 대첩이다.

북관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1592년 9월부터 1593년 2월까지 의병장 충의공 농포 정문부 선생이 의병 3000을 모집하여 부산에서 함경도까지 진출한 일본군을 경성, 장평, 임명, 백탑교 등 네 곳에서 승첩을 거두어 관북지역을 회복하고 풍전등화의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전투를 통칭하여 ‘북관대첩'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강력한 일본군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이만의 병력을 이끌고 침공해 온다고 하니, 조선의 관군들은 미리 겁을 먹고 도망치거나 숨어버리고, 오히려 반란을 일으켜 일본에 동조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함경도 북평사로 나가있던 농포선생은 정6품의 벼슬에 28세 젊은 나이로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당시에 종3품인 종성부사가 있었으나 의병장직을 고사하여 정6품이 대장이 되고 종3품이 부장이 되니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농포장군은 뛰어난 지략과 기묘한 전술로 죽기를 작정한 의병들과 힘을 합쳐, 조국을 구하고 기세등등한 왜군을 물리친 것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당시 선생의 공은 조정에 전달되지 못하고 오히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돌아가셨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뒤에 신원이 되고 함경북도 김책시 임명동에 전승을 기록한 비가 세워진다. 이 비는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鄭文孚)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모아 왜군을 무찌른 전투를 소상히 기록한 전승비로서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로 1500자가 새겨져 있다. 1707년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에 세웠다. 1905년 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 제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이 이 비를 보고, 우리나라에서 보면 대첩비지만 일본에서 보면 치욕적인 패배를 기록한 비 이므로 일본으로 가져가 야스쿠니 신사 뜰에 방치해 두었다. 이후 1978년 재일 한국인 최서면이 우연히 발견하여 불교계와 문화재청 후손 북한 등이 반환운동을 하여 2005년 한국으로 반환하여 다시 북한으로 환송하여 원래의 자리에 세웠으며 북한 국보 제193호로 지정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현재 진주시 이반성면에는 농포선생을 기리는 가호서원이 있고, 서원 내 에는 박정희 대통령 친필로 편액을 쓴 충의사가 있어 구국충신 농포선생을 천추만대에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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