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괜찮아, 괜찮아
시와 함께하는 세상-괜찮아, 괜찮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8.05 16:32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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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괜찮아, 괜찮아

이승훈 전집을 만들 때
이승훈 시인이 동숭동 사무실에 와서
뜨락의 파라솔 아래 먼지가 수북한 의자에 앉는데,
앉지 마시라고, 걸레질한 다음 앉으시라고 하자.
옷이야 털면 되지 괜찮다고
괜찮다고 그냥 우리 앉자고 한다
그리고 담배를 피운다
이제 담배는 피우면 안 된다고, 내가
말리자, 괜찮다고
괜찮다고 그냥 우리 한 대씩 태우자고 하다
원탁의 교정지엔 눈길도 주지 않고,
봄날, 태평한 봄날 파라솔 아래서
파르스름한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담배를 맛있게 태우는
이승훈 시인을 바라보며, 이선생님 이제
술도 못하시고 술 생각이 나면
어쩌지요 하고 물으니, 괜찮아
괜찮아 그냥 마시지 뭐, 그러면서
오늘 저녁에도 맥주 한잔하고
자야지 그게 편해, 봄날,
화창한 봄날, 그가 안주로 좋아하는 멸치가 생각나서
선생님 제가 썼던 ‘이승훈 멸치’는 맛이 어땠냐고,
시 얘기를 하자 그는 그냥 선사처럼 웃는다.

(김영탁, ‘모두가 예술이다’)

김영탁 시인은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데, 이승훈 선생 생전에 시인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이승훈 전집’을 편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어가 어렵지 않게 선생의 성격을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소탈한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이승훈 선생은 한양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시기도 하셨던 우리나라 원로 시인으로서 모두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다. 특히 그는 우리나라 모더니즘을 개척한 시인으로 아방가르드(avant-garde)의 선두에 섰던 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래전 진주에서 ‘이형기 문학제’ 행사 때 뵈었는데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맞이해 주신 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마 김영탁 시인도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겉치레와 형식을 거부했던 시인의 생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시인이 대표로 있는 출판사에서 선생의 전집을 교정할 즈음 먼지가 수북이 쌓인 의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앉으시는 소탈함, 말년에 폐암으로 병상에서 돌아가셨고, 의사나 주변인들로부터 담배를 피우지 말 것을 수 없이 권했건만 맛있게 그리고 멋있게 파르스름한 아지랑이를 뿜으셨던 선생은 당장 내일 큰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오늘 즐길 것은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분,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고, 그나마 안주도 마른 멸치면 몇 개면 족했던 분이다.

화창한 봄날, 그가 안주로 좋아하는 멸치가 생각나서/ 선생님 제가 썼던 ‘이승훈 멸치’는 맛이 어땠냐고,/ 시 얘기를 하자 그는 그냥 선사처럼 웃는다/ 실제로 선생은 선승(禪僧)처럼 생활하셨다. 우선 그의 차림새부터가 남달랐다. 생전에 선생은 양복을 입으신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항상 승복 비슷한 개량 한복을 입으시고 모자 역시 스님들이 즐겨 쓰고 다니는 것과 흡사하여 깊은 산사의 고승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스님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술 담배를 즐기셨다는 것 외에는…, 그리고 그의 시 또한 선승들의 오도송(悟道頌)과 비슷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선생께서는 불교의 선(禪)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의 저서 <선과 기호학>이나 <선과 하이데거> 등은 선시의 특징을 닮은 불승(佛僧)의 오도송이나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실존 의식을 시에 반영하고 해석하고자 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므로 한국 해체시의 출발점은 선생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해도 큰 이론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생전에 하나도 급할 것도 없이 태평스러운 모습으로 자유를 만끽하며 형식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당장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나의 생은 나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껏 생을 누렸던 선생의 성격을 시인은 몇 마디 에피소드를 통해 정확하고 섬세하게 ‘이승훈 시인다움’을 잘 묘사했으며, 오랜만에 선생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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