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6)-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견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6)-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8.09 16:1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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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6)-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견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갈래 성스러운 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생활),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새김), 바른 삼매(집중)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이다”

나는 40여년 나름 열심히 철학공부를 해왔다고 자부하는데, 그 과정에서 느낀 이상한 현상이 한 가지 있다. 철학자 본인의 언어보다 그것을 논하는 2차적 언어들이 훨씬 더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어려운 언어들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깊이 신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별로 권하지를 않는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좀 경멸하는 편이다. 1급의 철학적 언어들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은 물론 학생들에게도 1차적 언어들과의 1대일 맞상대를 적극 권하고 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의 언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말은 어렵지 않다. 쉽게 이해된다. (물론 그 실천은 별개 문제다. 난제 중의 난제다. 그건 누구나가 인정한다.) 그 언어들이 아주아주 구체적인 실제에 혹은 문제 그 자체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고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런 힘이 없는 언어는 제대로 된 철학이라고 할 수가 없다.

사설이 길어졌다. 위에 인용한 이른바 8정도(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려(正勵)·정념(正念)·정정(正定))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이건 웬만큼 불교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다 아는 엄청 유명한 것이다. 불교에 특화된 D대학의 교표도 이 8정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배 키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짐작컨대 아마도 이 8정도가 고해를 건너가는 배의 키 역할을 한다는 그런 상징적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게 어떤 것인가 하는 것도 누구나가 잘 알고 있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 설명들을 찾아보면 뭔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그 어렵고 복잡한 설명들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본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다 옆으로 밀쳐놓고, 혹은 선반에 올려놓고, 그냥 부처 본인의 말에 직접 귀를 기울인다. ‘바른 길’(正道)…그게 어떤 걸까? 그게 감각적 쾌락의 추구도 아니고 고행도 아닌, 그런 양극단이 아닌 ‘중도’라는 건 이미 밝혀졌다. 이 중도가 깨달음과 고요함으로 즉 해탈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길이라는 평가도 이미 내려졌다. 이 길에 여덟 갈래가 있다는 것도 드러났다. 말하자면 이 길은 8차로인 셈이다.
이것을 하나씩 들여다보자. 먼저 정견. 이건 어떤 길일까?

Katamā ca bhikkhave, sammādiṭṭhi? Yaṃ kho bhikkhave, dukkhe ñāṇaṃ dukkhasamudaye ñāṇaṃ dukkhanirodhe 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ñāṇ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diṭṭhi.[9]

비구들이여, 정견(正見)이란 무엇인가? 실로 비구들이여, 괴로움(dukka)에 관한 지, 고의 집기(集起)에 관한 지, 고의 멸진(滅尽)에 관한 지,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를 정견(正見)이라 한다.

‘정견’? ‘바른 보기’? 이게 뭘까? ‘바르다’는 건 특별한 설명도 필요없다. ‘잘못된’ 게 아니라는 말이다. ‘틀린’ 게 아니라는 말이다. 좀 확대해석하자면 ‘나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굳이 ‘바른’이라는 이 표현을 동원한 건 왜일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보통 그런 잘못된 것들을 보기 쉽고 또한 실제로 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바르지 않은, 바르지 못한 보기가 그 배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게 바른 ‘보기’일까…중요한 건 그 내용이다. 부처는 친절하게도 그 내용을 일러준다. 뭐지? 아니나 다를까. 역시다. ‘고’에 관한 것이다. 고의 일어남과 없어짐, 그리고 그 없앰의 길에 대한 것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그게 ‘바른 보기’라는 것이다. 여기서 ‘견’이라는 글자가 두드러진다. ‘보는’ 것이다. 해탈에 이르려면 올바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뭘? 고의 생성과 소멸을?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인가?

만일, 내가 만일 부처라면…가정 자체가 외람되긴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고의 생성과 소멸, 그리고 그것과 관련해 내가 한평생 말한 모든 것이다. 그걸 보라는 것이다. 그런 걸 보라는 것이다. 그런 쪽으로 시선을 향하라는 것이다.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이 아닌 쪽, 엉뚱한 고행이 아닌 쪽, 부귀공명이 아닌 쪽, 그러니까 진리라는 쪽, 해탈이라는 쪽, 괴로움이라는 실존적 현실과 그 벗어남이라는 실천적 노력 쪽, 그것과 얽힌 문제들, 이른바 3법인, 4성제, 8정도, 12연기 같은 것, 3독, 4념처, 5온, 6입, 8고…그런 쪽. 그런 방향으로, 그런 것들로 시선을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 진리임을, 진짜 중요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게 바로 이 ‘바로 보기’(正見)인 것이다. 나는 부처의 이 말을 이렇게 풀이한다. 어려울 것 하나 없는 말이다. 누구나 들으면 곧바로 이해할 수 있다. 젊은 부처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나는 거의 확신한다.

눈이라고 다 눈이 아니다. 대부분의 눈은 욕망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본다. 그건 바르지 못한 보기다. 그러나 부처의 눈은 달랐다. 그의 눈은 다른 쪽을 바라본 것이다. 찬란한 쪽이다. 그는 그것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때로는 현미경처럼, 때로는 망원경처럼. 그 놀라운 시력에 대해 나는 경탄한다. 그저 두손을 모으고 합장을 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 눈을 가지고 그런 것을 보았기에 그는 마침내 우리가 아는 그런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부처님이 된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이런 시선이었다. 우선 감은 눈을 떠야 한다. 그리고 보아야 한다. 저 진리들을! 그리고 거기로 향하는 길을! 올바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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