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이우걸의 아직도 거기 있다
아침을 열며-이우걸의 아직도 거기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01 15:57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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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이우걸의 아직도 거기 있다

아침, 서재에서 시집 한 권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있는 마음 없는 마음 다 풀어놓고 골목길을 돌며 동네를 슬슬 걷고 있다가 갑작스런 천둥소리를 당하는 때와 똑 같은 놀라움이었다. 이우걸! 이라는 이름이 천둥소리는 아니었다. 시인의 이름은 익히 들어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어, 이우걸 시인의 시집? 못 본 것인데 하고 책장에서 시집을 빼서 한 수를 읽는 순간 천둥은 쳤다.

아마도 이전에 벌써 이 시집을 읽었던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부분이 접혀 있어 시집을 들고 펴자 하필 팽이가 현란한 무지개를 피어내며 돌았던 것이고 내 마음에 천둥소리가 났던 것이다. 애초 처음에 읽었을 때도 충격이 어마어마했겠지만 팽이채의 매질과도 같은 ‘가혹한’ 현실을 살아내느라 까마득히 잊었던 게 분명하다. 그 세월이 천 근 무게의 슬픔으로 가슴을 눌렀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팽이’ 전문)

정녕 놀라움이었을까. 아니면 떨어져 누운 꽃잎의 서러움이었을까. 둘 다였을까. 제법 한참 동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빈 뇌리 멍한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느닷없이 내리는 비를 피하려 애써다가 차라리 맞고 젖자고 포기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음이 먼 하늘 소나기구름처럼 몰려왔다. 외양간에 있어야할 소가 사라진 걸 알아차리고 이어 간밤에 도둑이 다녀간 사실을 안 어머니의 맘이 이랬을까 싶었던 것이다. 효녀 둘째 딸이 사 준 암송아지를 이제야 새끼를 받을 만큼 키워놨는데…그 한없는 허전함이 그제야 내 가슴에 전해졌는데 어머니는 둘째 딸 위로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영아, 죽기 전에 너그 집에 한 번이라도 가고 접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살아계신 어머니는 둘째 딸에게 말했다. 나는 그러마고 약속했고 지난한 현실을 살아내느라 당연한 듯 지키지 못했다, 당연한 듯 말이다. 영악한 둘째 딸은 지금 깨닫는다. 현실은 결코 나에게만 가혹하지 않았고 지난하지도 않았다. 다만 온전히 제대로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사실에 비에 젖듯 한다.

이렇게 나의 얘기를 하자는 건 결코 아니었다. 정말이지 이우걸 선생님의 ‘팽이’에 대해 나름 최선을 다해 우아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시집 ‘아직도 거기 있다’에 관해서는 최소한 두어 번은 더 말하고 싶다. 시집 속에 수록된 시들에 대해서 한두 번, 그 시들을 생산한 시인 이우걸에 대해서 한두 번. 미리 말하지만 이우걸은 역사다. 그는 정직하게 현실을 살았고 여태 열정으로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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