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장과 진주장터
진주성-진주장과 진주장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02 16: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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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장과 진주장터

현재 진주 중앙시장이라고 호칭되는 진주장(晉州場)은 서부경남에서 가장 큰 장이었다.

1730년 4월1일 영조 때 진주 장에서 대역죄인 처형이 실시되었다.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장터에서 처형되었을까?

진주는 진주목으로 서부 경남을 통괄하는 상업 요충지요 교통의 중심지이었고 군사적,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대역 죄인은 효수형과 각종 처형법이 시행되었는데 죄인들 머리는 장대에 매달아 진주장이나 진주성문에 매달아 놓고 경각심을 일으키도록 했다.

진주 장에서 처형한 이유로 시내 대안리에 조선시대 감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주장날에는 세금 관리들이 5전씩 한 가지로 징수하게 되는데 지방 관청에서 사용되는 재정적인 힘이 되었고 세금원이 착복하는 일도 많았다.
진주장날은 객주들, 거간꾼, 되치리 장사꾼들 등이 흥정하고 중개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되었다.

한량(閑良)들과 기생(妓生)들이 만나는 곳. 투전판. 물물교환(物物交換) 등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1919년 3월 18일 낮 12시경 교회 종소리에 따라 진주시내 5곳에서 동시에 독립만세를 고창할 때 중앙시장에는 한규상, 장덕익 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다 잡혀간 곳이기도 하다.

투전판에서 돈을 잃고 기분 나빠 술 한 잔하고 잘나는 친구만나 막걸리 한잔하고 속마음을 떨어 놓고 하소연하기도 했으며 기생한테 다 바치고 도적이 내 돈을 가져갔다고 거짓말하는 남편이 되기도 했다.

진주 장은 상인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진주 상무회를 중심으로 발달해 오다가 공설 시장이란 명목을 붙이기도 했으며 5일장에서 매일 장으로 변경된 것은 점차 시장이 활성화되었다는 증거였다.

장대시장에 작은 주차장이 있다가 없어지자 그 일대가 망해 졌다고 말할 정도가 되었고 중앙시장은 시외버스 주차장이 가좌동으로 옮겨가면 상권이 차츰 소멸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앙시장은 대안동에서 동성동과 옥봉동으로 확장되었으나 장터에서 혁신도시와 신안동과 평거로 확장되는 반면에 중앙시장은 빈 점포가 엄청 많아져 상권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

중앙시장 2층과 지하상가 그리고 우리은행 뒤에 시작하는 청년장 등이 활성화되어 진주장도 다 같이 크게 신장(伸張)하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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