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8)-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어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8)-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06 15:5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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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8)-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어

Katamā ca bhikkhave, sammāvācā: yā kho bhikkhave, musāvādā veramaṇī pisunāya vācāya veramaṇī pharusāya vācāya veramaṇī samphappalāpā veramaṇī ayaṃ vuccati bhikkhave, sammāvācā.[9]
비구들이여, 세속의 정어(正語)란 무엇인가? 망어(妄語 거짓말), 양설(兩舌=離間語 이간질하는 말), 악구(惡口=粗惡語 험담/욕설), 기어(綺語 꾸며서 하는 말)를 피하는 것, 이것을 일러 세속의 정어라 한다.(잡아함경)

부처는 이른바 8정도의 한 갈래로 ‘정어’(正語, 바른 말)라는 걸 이야기했다. 나는 이 단어에 대해 특별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바를 ‘정’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말’(語)이라는 말 때문이다. 언어철학이라는 것이 나의 특별한 관심분야인데, 나는 이것이 부처의 언어철학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말의 존재가 특별히 반갑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의 언어철학은 내가 아는 서양 철학자들(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오스틴 등등)의 언어철학과는 그 결이 다르다. 언어의 본질이나 성격을 논하는 이론철학이 아니라 실천철학인 것이다. 특히 이것은 이른바 ‘구업’(口業)이라는 것과 연결돼 있어서 구체적-실질적이며 그래서 매력적이다. 부처의 지적에 따르면 구업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입으로 남을 속이는 망어(妄語)[거짓말], 둘째 이간질로 화합을 깨뜨리는 양설(兩舌), 셋째 험한 말로 남의 속을 뒤집어 놓는 악구(惡口)[험담/욕설], 넷째 요망한 말로 남을 현혹하는 기어(綺語), 등이다.

망어-양설-악구-기어, 불교경전에서 부처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들으면 참 묘한 느낌이 든다. 지금의 한국이나 2000 수백 년 전의 인도나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그런 느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들은 참 입을 함부로 놀린다. 거짓말, 욕설, 딴소리(한입으로 두말하기), 꾸민 말…지금도 세상에는 이런 말들이 차고 넘친다. 대부분의 입들은 듣는 귀를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내뱉는다. 그래서 나는, “무신경한 말 한마디, 입 밖으로 나갈 때는 깃털처럼 가볍지만, 사람의 가슴에 떨어질 때는 바위처럼 무겁다”, “때로는 한 마디의 말이 10년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때로는 한 마디의 말이 10년을 불편하게 해줄 수도 있다. ‘말의 위력’을 가볍게 보는 자는 인간과 삶을 말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이 배경에는 나의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인간은 언어적 동물(zoon logon echon)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회적 동물(zoon politikon)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 사회의 대기를 감싸고 있는 특유의 언어들을 마치 공기처럼 호흡하면서 그 영혼의 건강을 유지해간다. 따라서 언어라는 공기가 맑으면 영혼도 맑고 언어라는 공기가 탁하면 영혼도 탁해진다. 언어와 영혼 사이에는 그런 인과관계가 성립한다…듣고 말하는 언어들이 파라면 영혼도 파랗게 물들어지고 언어가 빨가면 영혼도 빨갛게 물이 든다. 이렇게 시각적으로 말하면 좀 더 이해가 빠를지 모르겠다. 언어라는 것은 책, 강의, 신문, TV…등등 그야말로 온갖 형태로 우리들의 눈과 귀를 통해 정신 안에 들어와 혈관을 타고 떠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자신의 피와 살과 뼈의 세포에 스며 알게 모르게 자신의 일부로 자리 잡는다. 그것을 우리는 ‘교양의 메커니즘’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졸저, 진리갤러리)

이러니 내가 부처의 언어철학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그의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 구체성을 띠고 있다. 경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부처가 죽림정사에 머물고 있을 때, 어느 날 이교도 악꼬사까 바라드와자라는 바라문이 자신의 형이 불교에 출가했다는 말을 듣고 부처를 찾아와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어댔다. 부처는 바라문의 욕설을 잠자코 다 들은 후 이렇게 말했다. “바라문이여, 당신은 집에 찾아 온 손님에게 다과나 음식을 대접합니까?”, “대접하지요”, “만일 당신을 찾아온 손님이 그 대접을 받지 않는다면 남은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습니까?”, “그들이 음식을 받지 않으면 당연히 나의 것이 되겠지요”, “그와 마찬가지로 당신은 욕하지 않는 나를 욕하였고, 꾸짖지 않는 나를 꾸짖었습니다. 악담하지 않는 나에게 또 악담을 하였습니다. 이것들을 나는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모두 당신 것입니다. 욕하는 사람에게 욕하고 꾸짖는 사람에게 꾸짖고 악담하는 사람에게 악담하는 사람은 마치 음식을 서로 나누어 먹고 서로 주고받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음식을 함께 먹지 않으며 주고받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부처의 이 말에 바라문은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부처에게 귀의했다. (쌍윳따 니까야, ‘브라흐마나 쌍윳따 1:2’)

부처 자신조차도 이렇게 직접 욕을 들은 적이 있는 것이다. 바르지 못한 말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이것을 이른바 구업이라고 성격 지으며 그 업보를 이야기하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인도식 발상이다. “만일 악구로써 남을 욕하고 비방하면 큰 죄과를 얻게 된다”<법화경>는 것이다. 그래서 <천수경>에선 입으로 짓는 모든 죄업을 날마다 참회하라고도 말한다.(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해탈을 하겠다면 우선 말부터 곱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정어’라고 하는 ‘정도’인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 불교 수행자가 묵언수행을 하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말에도 종류가 있다. 말에도 빛깔이 있고 온도가 있음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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