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연기로 소멸하지만
시와 함께하는 세상-연기로 소멸하지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09 15:1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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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연기로 소멸하지만

곧게 사신 아버지 일자로 누우신 병상
찾으신 고모도 힘주어 잡은 손 놓고
기역자 허리 펴셨지

향로에 꽂은 향은 곧게 서서
재를 무너뜨리고
한 줄기 회오리 연기로 소멸하지만

1에서 0으로 무(無)로 가기까지
무수히 많은 실수(實數)가 있어서
멀고도 먼 길, 쉬엄쉬엄 가도 되는 길

(조승래, ‘1에서 0까지’)

이 시는 정말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으로 보인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생각했는데, 조승래의 <1에서 0까지>는 그러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불교의 윤회사상과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는데, 우연의 일치일까?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도 그의 제자들에게 윤회사상을 가르치면서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그가 사용한 옷이나 이불은 모두 백색을 고집했는데, 이유는 염료를 사용하게 되면 다른 생명을 희생해야만 되기 때문에 불필요한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서양판 불교 사상을 연상하게 한다.

일반적으로 10진법이라 하면 0에서부터 9까지를 말하는데 0은 곧 무(無)를 의미하며 유(有)의 근원이기도 하다. 반대로 9는 유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다음 단계인 무의 근원이자 곧 새로운 숫자의 시작(변곡점)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곧 무를 한번 경험한 0이기 때문에 수학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10’이라고 표시한다. 동양에서는 9라는 숫자를 두려워하는데, 이유는 죽음이 임박했거나 새로운 변화로 불확실한 미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아홉수라고 하여 혼사(婚事)도 꺼리기도 했으며 저승을 ‘구천(九泉)’으로, 아득히 먼 길을 ‘구만리(九萬里)’라고 했던 것이다. 다만, 서양인들은 고달픈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의미로 희망이나 기대를 의미하고 있는데, 동서양의 시각 차이가 확연하다.

아버지가 일자로 누웠다. 즉, 무에서 1로 탄생하여 일생을 올곧게 사시다가 마침내 마지막 길도 ‘1’의 자세로 9를 보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1의 자세를 보고 2, 3, 4, 5, 6, 7, 8처럼 생의 굴곡에 따라 굽게도 살아오셨던 고모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보여주는 1자 모양으로 허리를 펼치지 않을 수 없었기에 ㄱ(기역자)처럼 굽은 허리를 1자 모양으로 펼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논리니, 시각적 발상이 독특하다 하겠다.

그래서 향의 연기도 허공을 향해 1자 모양으로 올라갔지만, 마지막 길인 소멸의 단계에서는 회오리 모양으로(0자 모양) 돌아가게 된다는 뜻이니, 0은 단순한 무(無)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새로운 0인 10이 되는 것이고,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回)가 되기 때문에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마지막 변곡은 회오리 모양(0 모양)으로 소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동안 아버지는 출생(1의 단계)에서 죽음(0의 단계)으로 살아가는 동안 많은 굴곡의 시간으로(실수: 2, 3, 4, 5, 6, 7, 8 )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좀 쉬엄쉬엄 힘들지 않게 다음 단계의 영(10)을 위해 여유를 가지고 가셔도 된다는 의미로, 아버지의 새로운 영(0→10)을 향해 천천히 쉬시면서 가시란 의미이니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보내는 애정(愛情)이자 아쉬움의 표현이리라 할 것이다.

조승래의 <1에서 0까지>는 비교적 짧고 간결한 시이지만,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삶과 죽음 사이에서 아버지의 영혼이 소멸하지 않고 영원하기를 기대하는 믿음과 효심이 잘 드러난 깊이 있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을 끝없는 슬픔을 일관하기보다는 그 슬픔을 승화하여 뭔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더욱 눈길이 가며, 아울러 죽음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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