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 내동면에서 박덕규 화백을 만나다
진주시 내동면에서 박덕규 화백을 만나다
  • 황원식기자
  • 승인 2020.09.09 17:45
  • 1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물난리 속 작품, 영원히 미완으로 남기다
▲ 지난 8월 28일 만난 박덕규 화가는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수해 때 작품들의 훼손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생명이 중요하지, 그림이 중요합니까”

절대 멈추지 않던 그의 붓 놓게 한 말

진주 내동면 폭우로 작품 대부분 침수
위급한 순간까지 그린 작품 미완으로

미술교사 퇴직후 22년간 전업 미술인
수천만원 평가 그림 한점도 팔지 않아


“이 사람은 그림밖에 모르는 사람입니다.”

박덕규 원로 화가(86)의 아내가 말했다. 화가는 일 년 중에 363일은 같은 시간에 일어나 미술관 주변을 정돈하고, 커피를 마시고, 오후까지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이 모두 5300여점이었다.

지난 1957년부터 학교 미술교사로 근무하다 퇴직한 후 22년 동안 전업 미술인으로의 길을 가고 있는 그는,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매일 반복된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일상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지난달 8일 진주시 내동면의 집중호우와 남강댐의 갑작스런 방류로 물난리가 있던 날, 그의 전시실과 작업실이 있던 박덕규 미술관도 물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지난 8월 8일 집중호우로 물에 잠긴 박덕규 미술관.
지난 8월 8일 집중호우로 물에 잠긴 박덕규 미술관.

그 이후 지난달 28일 박덕규 미술관을 찾았을 때 복구 작업을 한창 하고 있었다. 그곳은 폐교된 초등학교를 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교실 7칸 규모를 꽉 채운 어마어마한 양의 그림들을 대형선풍기로 말리고 있었다. 그림들은 색이 바래고 말았다. 이 그림들은 모두 박덕규 화가 혼자서 그린 것이라고 했다.

물에 잠긴 것은 전시된 그림만이 아니었다. 미술관 옆에 유물 전시관에는 화가가 학창시절 사용하던 필통, 교사시절 첫 월급명세서, 토기 그림이 아닌 그의 초기 작품들, 자신이 보도된 신문기사, 그가 수집한 토기 등 그의 모든 역사가 전시돼 있었다.

이 소중한 것들이 물에 잠겨 버린 것을 봤을 때 그의 심정은 어땠을까.

본보 기자가 박덕규 화가를 찾았을 때, 미술관 옆 작업실에서 수척해진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기력이 쇠약해져 앉아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다리에는 다친 상처로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날 화가로부터 물난리가 있던 날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침수 피해 다음날 박덕규 화가의 그림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다.
침수 피해 다음날 박덕규 화가의 그림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다.

◆아찔했던 기억, 그리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작품
지난 8월 8일, 그날은 모든 것이 노인의 일상에서 비켜갔다. 그는 매일 그랬듯, 오전 5시부터 미술관 앞 잡초를 뽑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세지는 비로 화실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커피를 마시며 유화 작업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어느새 작업실 입구까지 물이 차올랐지만 알지 못했다. 갑자기 화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119 구조대원들이 와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여기 앉아 있느냐, 위험하니 빨리 나가자”고 했다. 이 와중에도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에 못 나간다고 버텼다.

박덕규 화가의 스케치북에는 지난 8월 8일 수해가 있던 날의 그림이 있다.
박덕규 화가의 스케치북에는 지난 8월 8일 수해가 있던 날의 그림이 있다.

“영감님, 생명이 중요하지, 그림이 중요합니까.”


이 말을 들었을 때 박덕규 화가는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화실을 빠져 나왔다. 물이 조금만 더 찼으면 수압으로 인해 문이 열리지 않아 꼼짝없이 익사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완성된 자식 같은 작품들이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오후까지도 물이 빠지길 기다렸지만 진척이 없자, 결국 참지 못하고 물속으로 몸을 던지고 만 것이다.

필사적으로 20여분을 헤맸던 것으로 기억했다. 결국 작품들을 구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나왔지만, 저체온증으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계단을 올라가다 다리도 크게 다쳤다. 그날 이후 며칠 동안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박덕규 화가의 유일하게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 작업실이 물에 잠기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화가는 붓을 쉽게 놓지 못했다.
박덕규 화가의 유일하게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 작업실이 물에 잠기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화가는 붓을 쉽게 놓지 못했다.

“(미완 작품) 이대로 가만히 놔 둘 기라, 영원히 남을 기라.”

그는 물난리 속에서도 끝까지 잡고 있었던, 결국 완성하지 못했던 그림을 그대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처음으로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 그 그림에는 그날의 날짜(2020. 8. 8)가 선명히 적혀 있었다.

◆고집스럽고, 따뜻한 미술인
그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전부 토기(土器)를 소재로 한 그림이었다. 이중섭 화가가 소(牛)를 그렸듯, 어느 순간부터 그는 토기만을 그렸으며 그의 그림에는 그 옛날 토기를 손질했던 도공들의 숨결과 감정이 묻어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작품은 박덕규 미술관 외에서는 볼 수가 없다고 한다. 5300여 점이나 있었지만 단 한 작품도 외부에 팔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 한 장에 수천만 원의 평가를 내렸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작품은 돈으로 거래할 수 없다고 했다.

박덕규 화가의 작품. 화가는 5300여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단 한점도 팔지 않았다.
박덕규 화가의 작품. 화가는 5300여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단 한점도 팔지 않았다.

박 화가와 아내 모두 교사 출신이긴 하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녀 셋을 키우면서 아들을 서울에 있는 의대에 보내면서도, 박 화가는 단 한 번도 월급을 집에 가져다 준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 돈은 오로지 예술을 위한 투자로 썼다. 한 사람의 월급만으로 빠듯한 생활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경남도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자신의 전시회에서는 도지사와 시장 등 많은 축하객이 참석한 자리에서 아내에게 가정을 잘 꾸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강직하고 고집스런 예술가의 이면에 사람들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박 화가가 미술관을 운영한 이유는 그가 초등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1998년 당시 진주에는 상설 미술관이 한 곳도 없었기에 청소년들을 위한 미술관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그의 사후에는 수많은 작품들을 후대 사람들을 위해 물려줄 것이라고 한다.

현재 그림 5000여점과 각종 유물 등 수해를 입은 박덕규 미술관은 한국수자원공사 남강지사, 진주시, 각종 단체 등의 봉사활동을 통해 복구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박 작가는 하동 출신으로 경남예술인상, 제8회 진주시 문화상, 제29회 경남도 문화상, 문교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개천예술제 제전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진주를 대표하는 예술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황원식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