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정기복의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아침을 열며-정기복의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15 14:2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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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정기복의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은 정기복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어떤 청혼>을 발표하고 무려 20년만에 그 동안 쓴 시들을 묶어냈다. 20년, 참 긴 세월이다. 정기복 시인은 소위 ‘386세대’이니 생애 가장 바쁘고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그 시기는 물살은 사나워 파도가 끊임없이 뱃전을 때리고 비바람이 배를 흔들어대는 바다를 건너는 때.

모쪼록 그 다사다난했던 항해를 무사히(?) 아니면 대충(?) 일단 마무리하고 이 시집을 묶어냈다고 생각하니 깊이 숙연해짐을 어쩔 수 없다. 수많은 부침이 있었을 것이고 수많은 체념이 있었을 것이다. 정기복 시인은 몸과 마음에 다가온 그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수련한다. 지렁이나 민달팽이처럼 맨몸으로 철저히 감내한 그 부침과 체념과 수련이 고스란히 시집에 담겼다.

이렇게 정직하고 강직한 시집은 드물 것이다. 실린 시편마다 행마다 이 쓰레기더미 같은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유감하다. 하면서도 미련스럽도록 일말의 요령피우기도 없이 부딪친다. 시인은 특히 산행으로 어지러운 산 아래 세상을 살 수 있는 지혜와 견딜 수 있는 힘을 얻는 게 분명하다. 생활하는 곳이 경기도라 그랬을까. 북한산은 시인의 손바닥 안에서 알뜰하다.

시인에 의하면 북한산에는 다섯 개의 수려한 주요 봉우리가 있다. 의상봉, 원효봉, 문수봉, 여성봉, 노적봉이 그것이다. 북한산만이 아니라 시집 안에는 여러 산의 능선들이 강이 되어 도도히 흐른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 전해오지만 시집에 수록된 시를 읽고 있으면 정기복 시인은 답답하도록 순한 사람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함께 서둘러 산에 오르고 싶어진다.

수록된 시중에 ‘시시포스’를 읽으면 마치 한평생 같은 일이나 비슷한 일을 계속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생계가 휘청거리거나 무너질 수밖에 없는 나 자신의 모습과 맞닥뜨리게 된다.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그짓을 계속해야 하는지 당장 손을 탁탁 털어야 되는지. 하다못해 시인처럼 기를 써서라도 북한산에 올라 그 봉우리마다 손톱자국을 남겨야 하지 않을까, 다급해진다.

‘시시포스’ 바로 뒤쪽에 따라오는 ‘콜 하시라’ 라는 시에 접어들면 크크 웃게 된다.
고급 아파트 단지를 가시려거든/ 길에 널린 다른 택시를 이용하시고/ 성석동 잣골, 사리현동 은골, 효자동 사기막골, 원흥동 가시골, 구산동 노루뫼와 거그메…/ 골과 뫼와/ 선유리, 내유리, 벽제리, 도내리…/ 불러 촌스럽고 촌스러워 눈물나는 골에 가시려거든…

필자인 나는 지금 원흥동 가시골 옆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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