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청송 심(沈)부자 댁
진주성-청송 심(沈)부자 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17 14:2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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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
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청송 심(沈)부자 댁

옛날 이름난 부자는 300년이 넘도록 10대 이상 부(富)를 유지하는 가문이 있는가 하면, 천석꾼 부자도 당대에 망해 소작인들 집을 전전하며 걸식하다 죽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는 인덕을 베풀고 후(厚)한 부자는 모두가 감싸고 보호하기 때문이며, 악독한 지주는 원성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경북의 대표적인 부자 중에 청송 심부자 댁을 들 수 있는데, 청송 심부자 댁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는 송소고택이라는 고가(古家)가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3호인 이 고택은 조선시대 궁궐이 아니면 100칸을 넘길 수 없는 규정 때문에 99칸을 지었다.

청송 심씨는 조선시대 500년을 통해 정승이 열 셋, 왕비가 셋, 부마를 넷 씩이나 배출한 세칭 삼한갑족이다. 고려 때 위위시승을 지낸 심홍부(沈洪孚)를 시조로 하여 증손인 덕부·원부 대에서 크게 둘로 나누어지는데, 이태조의 역성혁명 후 좌의정을 지낸 덕부의 후손이 그 하나요, 새 왕조의 벼슬을 마다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개성 두문동에 들어가 지조를 지킨 원부의 후손이 또 하나다. 청송지방과 경남지역에 낙향하여 사는 심씨들이 대개 심원부의 후손들이다.

현재 청송에는 심원부의 후손 10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데, ‘덕천 심부자가’ 로도 그 명성이 높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심부자의 재력은 9대 2만석으로, 해방 전 일제강점기 때도 2만석을 했다고 한다. 조선팔도 어디를 가도 자기 땅이 없는 곳이 없었으며, 구한 말 개화기 때는 화폐의 가치와 변동이 심해 나라에 세금을 종이로 납부하다가 다시 은화로 납부하라는 지시에 따라 안계(의성)의 자기 소유 전답을 처리하여 은화로 바꾸자니 안계 고을에 돈이란 돈은 전부 모여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 밤 한밤중 동네 도둑이 든다는 소문을 듣고 집안 식구들은 모두 피신하고 안방마님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는데, 한 밤중에 도적떼 수 십 명이 몰려들어 살기등등하며 닥치는 대로 부수기 시작했다. 이때 백발의 안방마님이 나와 “이놈들아! 물건을 훔치러 왔으면 왔지 왜 기물을 부수는가. 내가 문을 열어 줄 터이니 가지고 싶은 대로 가지고 가정으로 돌아가거라” 하며 직접 열쇠를 가지고 광이나 곡간을 열어 주었더니 수십 명의 도둑들이 힘대로 지고 갔다고 한다. 도둑들은 크게 반성하고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선량한 백성이 되었고 이후 마님의 당당한 위압이 소문나 다시는 도둑이 얼씬도 하지 않았고 차츰 없어졌다고 한다.

청송의 심부자는 항상 덕을 베풀고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하며 또한 사치와 낭비를 멀리하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가족처럼 돌보아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사방백리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다. 그 후덕한 인심에 감동한 주변모두의 보호 속에 9대에 걸쳐 2만석의 재물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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