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는 이야기-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세상 사는 이야기-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17 14:2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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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이라는 수필에서 안톤 시나크는 울고 있는 아이, 정원 구석에서 발견한 작은 새의 주검,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서 죽어가는 사슴의 눈빛, 출세한 친구의 거만해진 태도, 그리고 자동차 뒷좌석에 앉은 여인의 좁은 어깨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썼다. 시나크가 그 글을 쓴 건 오래지만, 지금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많다.

예컨대 이데올로기에 경도돼, 오직 자신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의 확고한 신념과 잘못된 정의감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전쟁이 끝난 지 불과 70여 년 만에 이렇게 잘살게 된 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국전쟁이나 10월 유신을 직접 겪은 어른에게, 책에서 읽은 얕은 지식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가르치려 드는 젊은이의 주제넘음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국군이 외면한 수많은 피란민을 흥남 부두에서 구해낸 미군 장교와 미군 수송선을 보고도 반미를 부르짖으며, 자기는 물론, 자기 자녀도 슬그머니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 사람들의 위선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나라에 와서 우리를 위해 전사한 병사들을 보내준 고마운 열여섯 나라를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의 염치없음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제는 조금 잘살게 됐다고 거만해져서, 예전의 우리처럼 이국에 와서 고생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를 차별하고 임금을 체불하는 일부 고용주의 못된 태도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행복을 찾아 한국에 왔지만, 불행한 결혼 생활 속에 고국을 그리워하는 외국인 신부의 한숨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남북으로 분단된 것만 해도 서러운데, 또다시 동서로 갈라지고,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 부자와 빈자, 그리고 갑과 을로 나누어 반목하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반목과 증오가 우리를 슬프게 한다. 도처에서 발견되는 학연. 지연. 혈연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줄이 만든, 우리 사회의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슬픈 일이 어찌 그것뿐이랴.

수능 시험 날, 꼭두새벽에 집을 떠나 도박사처럼 단 한 번의 승부에 운명을 걸어야만 하는 우리 자녀와, 하루 종일 노심초사 시험 종료를 기다리는 부모의 타들어 가는 가슴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훌륭한 스펙을 갖고 있으면서도 일자리가 없거나 입사 시험에서 탈락해 힘없이 돌아서는 젊은이의 뒷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더 나은 자녀 교육을 위해 가족을 외국에 보내고, 텅 빈 방에서 홀로 라면을 끓이는 ‘기러기 아빠’의 처진 어깨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믿고 맡긴 우리 아이를 무자비한 주먹질로 야구 스윙처럼 날려 보낸 어린이집 보육교사의 폭력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환자 이송 중인 앰뷸런스를 못 가게 차로 막아선 어느 운전자의 이기심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곤경에 처한 사람의 필사적인 심정을 악용해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의 악랄함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자녀나 아내를 자기 소유로 착각하고 학대하거나 동반 자살을 강요하는 남자들의 무지함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렇지만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들도 있다.
세계 도처에서 부러워하고 배우러 오는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외제 물건을 팔던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오늘날 세계시장을 석권한 삼성과 엘지와 현대의 성공도 우리를 기쁘게 한다.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린 한류와 운동선수의 인기도 우리를 기쁘게 하고, 키 크고 인물 좋고 영어 잘해서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우리 젊은이들의 당당함도 우리를 기쁘게 한다. 다문화 가정 자녀들이 만든 무지개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우리 함께 만들어가요, 아름다운 세상’이 우리를 기쁘게 한다.

무겁게 짓누르는 슬픔 속에서, 그래도 우리를 지탱해주고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그런 조그마한 기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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