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독이라는 거
세상사는 이야기-고독이라는 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9.22 13: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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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자/시인
백숙자/시인-고독이라는 거

모든 것은 시간이 밀어낼 줄 것이라 믿는다. 슬픔도 아픔도. 소녀가 늙은이가 되듯이.
태풍도 바이러스도 숨 막히게 하는 지금 불안 불안한 시간의 연속이다.
긴 장마의 습도에 기력을 모두 빼앗기고 연이은 태풍에 놀라 몸도 마음도 모두 젖고 늘어져 매사가 시들하고 매가리가 없다.

길을 가면서 곁을 스치는 사람에게 부딪치지 않으려 저만치 비껴서 조심하며 걷는 이 민감한 풍경은 어쩌란 말이냐. 우리의 숨통을 쥐고 조여 오는 질긴 바이러스에 불안한 눈빛은 이제 그 경계를 지나 그믐달처럼 이지러진 그 하루를 살고 있다.

아침저녁 창문을 닫는다. 나와 밖에의 차단. 너와 나의 거리를 차단하는 것 같아 문을 닫는 손이 멈칫한다.

한량없이 열어 두었던 그 창문을 닫으며 알 수 없는 비애에 잠긴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섰다. 아니 내가 서 있는 건지 아니면 속일 줄 모르고 정직하게 찾아오는 고마운 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마당에 깔리는 선명한 나뭇잎 그림자는 진즉에 선선함을 풀어 놓았는데. 나만 몰랐다.

첫사랑같이 출렁대는 설렘과 환희. 보고 싶은 사람은 만나야 하는데. 이 계절에. 그 즐거움 모두를 유린당한 억울한 심정은 비단 나만 갖는 우수일까? 지금의 일상이 마른 갈비 부스러기같이 푸석거리고. 쉬지 않고 카톡카톡. 일깨우는 안전 문자. 나를 가두는 철문 같아 주눅이 들고 움츠려진다. 거미줄보다 더 촘촘한 그물 하나 내려와 슬픔에 매몰당하는 이 느낌. 이것이 우리의 감옥일까?

어느 시인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늘 그대가 그립다. 했던가.
이 시인은 진정 나와 타인의 닿지 못하는 감정의 거리. 그 노선까지 꿰뚫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천재 시인이다. 인간 감정의 길이도 척척 잴 수 있으니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저 혼자 느끼고 생각하며 주체가 되어 걸어가는 외로운 길인데. 혼자라는 이 무미건조한 단어가 보이지 않는 작은 미생물로 하여 더 낯섦은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증거. 아니 인생의 완성 단계라 위안도 삼아 보지만 어찌 그 깊은 천길 늪에 홀로 고립되는 것 같아 초조하다.

그래서 마음속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토해내어도 흉보지 않고 들어줄 네가 이 순간 너무 그립다.

넌 어디쯤 있니? 축축하고 습한 이 기분을 모두 전달할 수는 있을까? 외로움과 슬픔의 근원지를. 내게 들어와 혼란을 주는 이 까닭을 가려서 조곤조곤 설명할 수 있는가 말이다.

생명 아주 깊은 바닥에 누룽지같이 더덕더덕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허무와 알 수 없이 치미는 분노와 열망을. 터를 넓혀 자라는 미생물에 붙들린 그 본연의 형태조차 알 수 없으면서 또 실체도 없는 것 아니 있는 것에 저당 잡혀 짐승같이 소리 내지 못하는 그런 현실을. 손짓 몸짓으로 수화를 하는 배우같이 애를 써야 할지 모른다. 듣는 사람도 감정의 온도만큼 온전히 이해하며 공감할는지. 너는 다만 일상의 그 근저에서 조금씩 이해할 뿐. 혼자 감당하고 견뎌야 할 스스로의 몫이다.

길이 없는 그 길까지 달리고 싶은 간절한 생명의 꼬투리를 찾아야 한다. 꼭 집어 말하자면 어느 것도 잡히지 않는 수시로 변하는 그 생각을. 그리고 간절한 이 열망이 지금의 나를 밝은 세상으로 손잡아 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믿는다. 저 미생물의 뿌리를 뽑아 완전 소멸시킬 수 있는 우리의 힘을, 그리고 우리 의료진의 기술을, 또 우리의 하나뿐인 생명을. 그러므로 오늘을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을, 가까운 지인이 이사 가면서 고전 명작 한 상자 보내 주었다. 지금 나의 번민과 어지러운 혼돈의 끈에 묶여 허둥대는 나약한 모습이 보이는지. 그래서 시작한 책 읽기. 여러 가닥으로 어긋나던 생각들이 차츰 가지런해진다. 책이라는 삶의 안내서는 스산한 공허함은 별것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니 익숙해서 그런지 주인공이나 그 시대 상황을 눈앞에서 보는 것 같이 이해하기 훨씬 수월하다. 그러니 감동도 배가가 되어 좋다. 바쁘다는 이유로 짧은 글만 대충 읽었는데. 이번의 시간을 통해 고전을 최고의 오락으로 생각하고 단풍놀이 대신해 두루 읽을 참이다. 나약해지고 무기력한 일상의 탈출을 도와준 독서. 좋은 일이던 또 힘든 일이건 그것들은 모두 우리와 더불어 지나가는 길손이 아닐까? 나도 그 속에서 내일로 조금씩 걸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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