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10)-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명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10)-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명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0.04 15:3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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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10) 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명

“어떤 것을 바른 생활(正命sammā-ājīīva)이라 하는가? 집착이 없이 마음의 해탈을 잘 생각하여 관찰할 때,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분수를 알아(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 알며, 남을 속이는 (온갖 기술과 주술의) 삿된 직업으로 생활하지 않고 다만 법으로써 옷을 구하며, 법이 아닌 것을 쓰지 않으며, 또한 법으로써 음식과 자리를 구하며, 법답지 않은 것은 따르지 않는 것, 이것을 바른 생활이라 말한다.” 《중아함경》 제7권: 분별사성제경(分別聖諦經)

비구들이여, 정명(正命)이란 무엇인가. 성스러운 제자들(ariyasāvako)이,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활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이것을 정명이라 한다. (<상윳따 니까야> 5-45-8)

나는 학교에서 〈인생론〉이라는 교양과목을 강의하고 있는데, 거기서 ‘의식주’라는 걸 주제의 한 꼭지로 다루고 있다. 인생론이라는 좀 철 지난 느낌의 제목도 그렇고 ‘의식주’라는 내용도 그렇고 그딴 게 무슨 철학이냐며 흰 눈을 뜨는 사람도 없지 않은데, 나는 이게 내가 전공한 저 고답적인 형이상학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진짜 철학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식주라는 게 보통사람에게는 사실상 인생의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공부와 일이라는 것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라는 시중의 저 흔한 농담도 그 진실을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시를 쓴 적도 있다.

돌아보니 나,/고달픈 육신 추스르면서/하루 세 끼, 한 평생 9만8550끼/먹고 살았고/하루 여덟 시간, 한 평생 무려 30년/자고 살았고/최소 하루 두 번, 한 평생 6만5700번/입고 벗으며 살아왔네//먹고 자고 입는 일/인생이었네//한 평생 읽고 쓴 육중한 철학책들/문득/깃털처럼 가볍네/진실은 늘/가까워서 멀었네(이수정, <푸른 시간들> 중 '어느 구순의 인생론')

그런데 이걸 저 심오한 불교가 건드리고 있다는 걸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그 철학적-인생론적 의의를 논하는 그런 건 아니다. 이게(즉 의식주가)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런 걸 정말 부처가 언급했나? 그렇다. 어디서? 어떻게? 저 유명하고도 유명한 ‘초전법륜’에서다. 저 유명하고도 유명한 이른바 ‘8정도’의 ‘정명’(正命sammā-ājīīva: 바른 생활, 바른 생계)이라는 게 바로 그거다. 이 ‘명’(ājīīva)이라는 게 바로 ‘먹고사는 것’이다. 부처도 그게 삶의 기본적인 것임을 인식하고 있었고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증거도 있다.

어떤 것이 바른 생활(正命)인가? 의복․음식․침구․탕약을 법답게 구하고, 법답지 않은 방법으로 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제28권 / 784. 사정경(邪正經)

이렇게 의식주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약’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다. 현실을 생각하면 이것도 의식주 못지않게 중요한 항목이기는 하다.) 이 외에도 많다. 그런데 부처는 왜 굳이 이걸 8가지 바른 길 중의 하나로 제시했을까. 짐작건대 사람들이 온 삶을 여기에(즉 의식주에) 다 쏟아붓고 더욱이 온당하지 못한 방법으로(법답지 않은 잘못된 생계로) 이걸 추구하고 바로 그 때문에 ‘고’를 초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게 ‘건너가기’(해탈)를 방해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리하게 구하지 않고, 분수를 알아 만족할 줄 알며, 남을 속이는 삿된 직업으로 생활하지 않고…법답지 않은 것은 따르지 않는 것’(<중아함경> 제7:분별사성제경), 이런 언급이 역으로 그걸 알려준다. 무기/ 사람/ 동물/ 술/ 독약 등의 다섯 가지 장사를 금한다는구체적인 내용도 있다.(<앙굿따라 니까야>, 장사경 A5:177) 이런 법답지 않은 것들로 생계를 꾸려가는 것은 21세기인 지금도 여전히 아니 더욱더 현실이다. 부처는 그런 걸 경계하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이 생계라는 것은 다 ‘돈’으로 압축된다. 그게 고의 원천인 것이다. 누가 이것을 부인하랴. 사람들은 이것을 차지하기 위해 온 인생을 건다. 살벌하게 경쟁하고 훔치고 빼앗는 건 예사고 심지어 죽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횡령도 사기도 도박도 투기도 … 다 그 범주 안에 있다. 그렇게 차지한 돈으로 호화로운 음식을 탐하고 명품을 몸에 걸치고 아방궁을 짓는다. 그 밖에도 온갖 호사를 추구한다. 현대인의 삶을 폭넓게 그리고 깊숙이 지배하는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하는 것도 다 그 ‘명’(命: 생계/생활/생업/먹고사는 것)과 연관된 것이다.

고행의 과정에서 먹지 않아 쓰러져본 적이 있는 부처다. 수자타의 우유죽을 먹고 되살아나본 적이 있는 부처다. 80평생 어쨌든 옷을 걸쳤던 부처다. 80평생 어쨌든 매일 자리에 누웠던 부처다. 그가 평생 먹지 않고 살았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고 알몸으로 다녔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고 맨땅에 누워 잤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런 건 인간이 아니다. 그러니 그도 당연히 의식주의 필요성 내지 중요성은 알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온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구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가자인 그에게는 그 대안이, 즉 온당한 방법으로 구하는 것이 탁발이고 보시였을 것이다. 그 해당 장면은 불경 곳곳에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결국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은 그 ‘법답지 않은’[=부정한] 방법으로 구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생활 주변에 실제로 넘쳐나고 있는 그런 것들… ‘무리하는 것, 분수를 모르는 것, 만족할 줄 모르는 것, 남을 속이는 것, 무기/ 사람/ 동물/ 술/ 독약 등을 파는 것’…지금도 누군가는 이런 것으로 먹고살고, 더러는 떼돈을 벌기도 한다. 무기상, 인신매매단, 마약상…(동물판매와 주류 판매는 일단 합법화되어 있기는 하다) 누구는 그러다가 망하기도 한다. 감옥에도 간다. 그런 게 ‘고’가 되지 않는다면…마냥 좋기만 하다면…, 그런 경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말려도 소용없다. 그러나 그게(자신의 돈벌이가) ‘고’로 이어진다면, 그때는 부처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법답게 구하고…’ 즉 ‘정명’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 끝에 아마 저 고요(니르바나)의 경지로 건너가는 조각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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