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김동리 문학관 건립과 ‘갈등’영화화를 창안한다
칼럼-김동리 문학관 건립과 ‘갈등’영화화를 창안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0.05 14:5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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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
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김동리 문학관 건립과 ‘갈등’영화화를 창안한다

한 작가의 갈등은 실로 좀 길었다. 불교와 기독교의 갈등이 심했다. <사반의 십자가>와 유명 한 영화 <등신불>이 있다. 항상 글을 쓰면서도 글의 미완성은 마음을 깊게 아프게 한다. 김동리 선생의 타고난 독서를 하고 주관적인 흐름을 보면, 란드만을 비롯한 소크라테스, 니체 등 많은 철학자들이 사람을 미완성 존재로 해석했다. 원초적 천성과 자유의지에 의해 객관적인 역사를 통한 철학적 교육 환경에 의해서 창조한다. 문화적인 인간으로 성숙해 가면서 제2의 천성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문학 사회론으로 글을 창작하는 작가들이 책을 읽게 만드는 모든 기초의 뒷받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필연적인 기술이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상황은 학교 교육을 제외한 모든 형태의 교육은 글쓴이가 대중에게 읽게 만드는 역할이 중요하다. 독자들에게 접목시키는 정보 기점이 바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김동리 선생은 항상 대학에서 평범한 교육을 하는 데 힘썼다. 호적 명은 김창귀(자는 동리)이다. 지상주의에서 독창적인 삶으로 천재적 세계로 가는 모습의 작가로 보였다. 5년간의 투병 생활의 모습들이 작품으로 이어져가는 것이 정든 진실의 문학적 통찰이라 생각한다. “작가 스스로 체험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가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김동리는 1940년 6월17일에 결혼하고 1966년에 이혼을 했다. ‘김동리 다솔문학협회’를 등록하여 행사를 시작 한지가 벌써 5회가 되었다. 해마다 문학 행사를 하고 문학관을 건립하는 것이 회칙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필자가 제목<갈등>(김동리 선생의 일대기)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새로운 공감에 힘입어 경남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 언저리에 땅을 기증받아 행정적인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설계가 되지 않고 사고가 났다. 기증한 분이 은행에서 2억5000만원의 돈을 차용하고 변제를 하지 않고 미루고 있어 기다리는 중이다.

김동리 선생은 다솔사에 들어와 11년의 세월을 두고, 주지 최범술, 독립운동가 스님 한용운, 윤리의 창시자 김범무, 스님의 교사 김범린을 모시면서 ‘광명학원’을 만들어 한국어를 가르쳤다. ‘왜놈’ 이란 표현까지 쓰며 일제 통치를 강하게 규탄했다. 3·1운동 탄압의 잔학성을 폭로한 여느 기사는 조선 통치의 정신이다. 일제가 섬뜩해질 정도의 격문 같은 제목을 달았다. 광명학원은 폐쇄되고 김범무는 감옥 가고, 김동리는 해인사와 만주에 이어 하동골에서 1년을 숨어 있는 동안 소설<역마>를 발표했다.

하동군에서는 <역마>영화 촬영에 들어갔다. 황희 여사는 작가의 가는 길에 발전적인 것이면서 환경이 좋아지리라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신문사 작품 공모에 입상되고, 글 쓰는 것이 훌륭해 보이는 모습에 성당에서 세례를 받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했다. 작가의 길이 모험적인 어려움도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선 듯 결혼을 허락하기로 마음먹었다. 세례를 받고 식을 올리면 전도가 될 것이란 기대로 황희 여사는 부풀어 있었다. 결혼조건으로 김동리에게 사전에 요구를 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조건을 받아들여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가브리엘이었다. 혼인은 1940년 6월17일 옥봉 성당 봉계공소(당시는 원전공소)에서 천주교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김동리의 나이는 26세 김월계 나이는 20세였다. 주례신부는 김계룡(베드로)이었고 우라두는 신랑의 증인, 장안나는 신부 측의 증인이 되었다. 원전 안동네에 자리하고 있는 성당은 조용하고 신자들만의 찬송가만 들렸다. 연이어 광명학원에서 약식으로 일반 결혼식을 올렸는데 주례는 한용운 스님이었다. 사람들은 이들 신혼부부가 천불나게 봉계 공소와 다솔사를 왔다 갔다 왕래를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곤명에서 황희 여사의 딸 김월계 교사와 결혼하고, 아들과 딸을 낳고, 아내의 내조에 힘입어 많은 작품을 창안하여 썼다.

결혼 후 김동리 선생은 김월계의 정성스런 내조에 힘입어 왕성한 창작 활동을 많이 하였는데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단편 <정원>, <생일>, <잉 여설> 신시대의 문학정신 단편 <황토기> , <찔레꽃>, <혼구>, <동구앞 길>, <완 미설>, <소년>, <회계>, <다음 항구> 윤회설 평론 <순수문학의 진의>를 발표하면서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에 당선되었다. 사천시 다솔사 일원은 김동리가 사상적 기반을 다지고 수많은 작품을 쓴 곳이므로 문학제를 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관>을 지을 수 있다는 확신을 했다. 그 이유는 다솔사를 거점으로 ‘만당’이 조직되고 활동을 했던 것은 빛나는 독립운동 근거가 된다.

3범이라 하여 최범술, 김범무, 범산 김법린 등은 우리나라 동양학 내지 불교학의 태두였다. 한용운 독립운동 승려 시인의 역사적인 업적도 있었다. 김동리의 소설들은 근대 이후 한국문학의 중심이요, 대표적인 성과물이다. 광복 이후 좌우의 논쟁에서 김동리 역할은 실로 중요한 실적을 남기고 있다. 사실 다솔사를 모르고 한국의 근대사를 말할 수 없다. 한용운의 활약. 그 한 시집 발굴 등만으로도 소중한 근거지가 된다.

김동리가 존재하므로 이후 이병주가 나오고, 박경리가 나올 수 있었다. 김동리 첫째 부인이 이곳 출생이고 자녀들의 고향이 사천인 것은 특이한 역사적인 운명이었다. 어찌하였던 김동리 사천 시절은 중요하고 역사적인 국면을 지니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사천에 김동리 문학관을 건립할 것을 강력히 실천사업으로 하루빨리 진행되어야하는 것이다. 문학. 역사. 종교. 철학 등의 수준을 지역의 지평 위에 올려놓는 일이기도 하지만, 노벨 문학상 10위권에 든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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