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한글날에 생각되는 조선어학회​ 사건 일화
도민칼럼-한글날에 생각되는 조선어학회​ 사건 일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0.13 14:36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
김기원/경남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남강문학협회장-한글날에 생각되는 조선어학회​ 사건 일화

어릴 적 생긴 사건이라 생각조차 사라졌지만 지난 9일 한글날을 맞아 문득 조선어학회 경남 조직책 김법린선생의 비밀 단원이었던 아버지와 할머니가 언쟁을 높이며 다툼 소리를 듣고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라 머릿속 구석에 필름처럼 남아 있어 생각을 정리해 봤다.

어느 날 저녁 무렵 할머니 방에서 아들의 허리띠를 잡고 매달리며 밀칠락 내칠 록을 반복하며 할머니가 아들을 보고 눈물을 짓고 앙칼지게 아버지를 행하여 호소하는 큰 언행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 나와 공포 분위기가 한동안 흐른다. “아범아, 조선말 사전 만들기에 네가 꼭 참여해야 하느냐, 눈알이 바르게 생긴 생때같은 아이들이 아니 보이느냐, 지나간 사건 때 너는 일본 순사에 잡혀갔어. 모질게 매 맞았고 손가락마다 손톱 밑을 바늘로 쑤셔 크게 앓았지, 간장 뜸질을 시켜 아픔을 겨우 면하였는데 또 조선 말 심부름을 하겠느냐, 인제 그만두어라, 조금 전에 일본 순사가 왔다 갔다. 다음은 네가 아니라 아이들을 잡아가서 손톱 밑에 바늘로 막 쑤시겠다고 호통을 치고 갔어. 아범아 아이들 죽는 꼴 너 눈으로 보겠느냐? 단판을 내자” 할머니는 애절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하면 호소를 한다.

부친은 결국. 할머니 앞에 조선 말 모으기에 참여 아니 하겠다는 서약으로 끝났듯 했지만 부친은 할머니 눈을 피해 늘 조직을 염원했고 방앗간에 둔 쌀을 팔아 선생을 찾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부친이 어떤 일을 했는지 늘 의문을 가져왔고 부친으로부터 김법린선생이란 이름을 자주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법린 선생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한때 사천 다솔사에 은둔했다가 프랑스 유학으로 이름조차 잃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초대 문교부 장관 시절 아버지를 찾아왔던 기억뿐이다. 필자 역시 어릴 때 사건이고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하여 알아야 할 여유가 없었다. 몇 달 전 어릴 적 가까워 살았던 고향 친구 조카가 김법린선생과 범어사 활동 내용을 보내와서 매우 감명 깊게 읽었던 감정이 채 식기 전 어른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한글 지키기에 노력한 수난사를 최현배, 임동진 선생의 특강을 한 번 들은 바 있어 한글날을 맞아 더 생각할 기회가 된다.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를 강화할 목적으로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고, 1939년 4월부터 학교 국어 과목 전폐 및 조선어로 발행되는 각 신문·잡지를 대부분 폐간시켰다. 1941년에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고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 정책으로 조선어 교육 전폐, 우리말 우리글 사용 금지, 무조건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직장 학교, 사회단체에 우리 말 사용자를 색출하여 주일마다 체벌 주는 제도를 장려했다.

일제는 내부 반항을 염려하여,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내검을 강화했다. 1942년 4월부터 전국적으로 우리말 모으기 운동과 우리 말 사전 편찬이 비밀리에 진행된다. 그런데 1945년 9월8일 현 서울역 운송창고에 의문의 원고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그 원고 뭉치가 곧 1929년부터 1942년 사이에 13년간 비밀리에 작성한 사전 원고로 최종 수정본 <조선말 큰 사전 원고>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원고가 사라진 배경은 1942년 10월 식민지 지배자에 의해 우리말 연구, 정리, 보급을 위해 사전 편찬에 관계한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함경도 함흥, 홍원 경찰서에 의해 관계자가 검거됨으로 발각된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이다.

1929년 10월에 조선어 사전 편찬위원회 위원으로 각계 대표 108명과 이후 조직이 그동안 작업한 <조선 말 큰 사전원고>가 증거물로 제출되어 60여명은 유죄 판결되고 12명과 증거 서류 일체가 경성고등법원으로 보내지는 과정에 <조선말 큰 사전원고> 뭉치 상자가 증거물로 제출 아니 되었다. 1945년 8월 12일 제판 진행이 기각되고 해산된 조선어학회는 재조직하여 1949년 9월에 한글학회로 개명되었다, 원고 17권 가운데 1957년부터 현재까지 6권이 발행되고 나머지 원고는 한글학회,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래 알게 된다. 필자는 부친과 김법린선생의 관계조차 의문이다. 기록마저 화제로 모두 타버렸고 사건 관계자까지 고인이 되어 과거 내용을 알 수가 없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살았다, 사실 일제의 눈빛을 피해 먹고 살아야 했고 못 입고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살면서 나라 잃음을 슬퍼했고. 한글을 지키겠다는 충성심, 자신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였던 애국지사님께 명복 비는 바이다. “요즘 나라 꼴이 왜 이래”, 유행어가 될 만큼 우리는 새로운 다짐과 정신 차림이 필요시대라 생각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