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11) 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려
아침을 열며-불교의 이모저모(11) 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0.18 13:4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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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불교의 이모저모(11) 중도, 여덟 갈래 올바른 길 정려


비구들이여, 정려(正勵=正精進=正勤, 巴: sammā-vāyāma, 梵: samyag-vyāyāma)란 무엇인가? 미발생한 불선(akusalānaṃ)은, 이것이 생겨나지 않도록, 비구들이 관심을 갖고 노력해 매진(viriya)하는 것이다. 발생한 불선은, 이것을 해소하도록, 비구들이 관심을 갖고 노력해 매진하는 것이다. 미발생한 선(kusalānaṃ)은, 이것이 생겨나도록, 비구들이 관심을 갖고 노력해 매진하는 것이다. 발생한 선은, 이것이 확대되도록, 비구들이 관심을 갖고 노력해 매진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정려라고 한다.

부처가 제시한 이른바 8정도 중에 ‘정정진’(正精進)이라는 것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가지런한 것을 좋아하는 터라 글자 수를 다른 7개와 맞추기 위해 이를 ‘정려’(正勵) 혹은 ‘정면’(正勉)이라 부르고 있다. 의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바른 노력’이라는 뜻인데, 정진이라는 이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내 앞에 다가온 적은 별로 없었다. 그저 막연히 스님들이 득도를 위해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 유학시절, 이 단어가 내 관심 한 귀퉁이에 머물렀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약간 불교국가라 내 생활주변에 사찰이 많았고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상대적으로 좀 많이 들려왔는데, ‘정진요리’(精進料理쇼진료리)라는 것이 좀 흥미를 끈 것이다. 육식을 배제한 이른바 사찰음식을 그들은 그렇게 불렀다. 먹어볼 기회도 있었는데, 보기도 좋았고 맛도 좋았다. 그것을 ‘정진요리’라 부르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게 계기가 되어 정정진이라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요리는 사실 정진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긴 했다.

그래서 일부러 찾아봤는데, ‘정진’이란 ‘관심을 갖고 노력해 매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사람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그건 세상 누구나가 다 안다. 특히나 일본 사람들은 ‘간바루’(분발한다, 노력한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터다. 부처님씩이나 되는 분의 말을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는 왜 굳이 이 말을 한 것일까, 여덟 가지 ‘바른 길’의 하나로서.

이유는 물론 있다. 아마도 첫째는 관심을 갖지 않고 게을러 노력하지 않으며 성심을 다해 매진하지 않는 사람들, 특히 그런 수행자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 말의 표현 자체가 알려준다. 그런데 사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말의 내용이다. 무엇에 관심을 갖고 노력해 매진하라는 말인가. 그걸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 본인의 말을 직접 들어봐야 한다. 부처는 친절하게도 그 내용을 직접 일러준다. 정진, 즉 노력의 내용은 ‘선악’(선-불선)에 관한 것이다.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라는 말이다. 어떤 노력? 이런 노력이다. ‘선’은 있게 하고 ‘불선’은 없게 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머리 좋은 인도인답게) 이걸 세분해서 구체적인 경우들을 알려준다. 넷이다.

첫 번째, 아직 없는 불선
두 번째, 이미 있는 불선
세 번째, 아직 없는 선
네 번째, 이미 있는 선

이 각각에 대해 노력할 내용도 따로따로 언급해준다.

첫 번째, 안 생기게
두 번째, 없어지게
세 번째, 생겨나게
네 번째, 는많아지게

간단명료하다.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다. 듣는 즉시로 이해가 가능하다. 이렇게 말을 쉽게 한다는 건 모든 위대한 분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말은 쉽지만 그 실천은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오직 드문 자들만이 이 쉬운 말을 어렵게 실천한다. 그래서 정진이, 각고면려가, 필요한 것이다. 그게 ‘정도’(바른 길)인 것이다. 쾌락도 고행도 아닌 ‘중도’인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고 확인해보라.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추구에는 관심이 많지만, 선악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좋은 것은 좀처럼 생겨나지 않고 나쁜 것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좋은 것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고, 나쁜 것은 너무나 쉽게 생겨난다. 이게 부처의 그때나 우리의 지금이나 변함없는 현실이다. 동서고금 보편의 현상이다. 부처는 그걸 다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그는 악의 적극성과 선의 소극성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불선을 선보다 먼저 언급한 것이다. 저 발언의 순서에도 의미가 있는 셈이다.

우리는 초전법륜의 이 말을 21세기의 뉴스들 속에서 확인한다. 불선은 흔하고 선은 드물다. 선은 오늘날 거의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선인은 참으로 희귀종이다. 반면에 악은 마치 저 미세먼지처럼 세상에 만연해 있고 테러리스트나 게릴라처럼 공격적이고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전파력이 강하다. 정진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정정진, 올바른 노력, 각고면려, ‘선’을 위한…부처의 입에서 나온 이 단어는 그래서 저 2000 수백년의 세월을 넘어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아니, 2000 수백년이 더 지난 후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인간에게 선이 있고 그리고 악이 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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