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청산리 전투 박영희 부관
진주성-청산리 전투 박영희 부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0.21 16:3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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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청산리 전투 박영희 부관

청산리(靑山里)일대의 전투에서 김좌진(金佐鎭)의 부관으로 대승리의 주역이었던 박영희(朴寗熙) 호는 검추(劍秋), 금추(琴秋)이고 異名(이명)은 두희(斗熙), 장섭(長燮)이다.

박영희 선생은 휘문의숙 재학중 1915년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은사인 이시영을 따라 만주로 망명했다.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자 모교의 교관과 학도장으로 근무했다.
1919년 8월7일 정의단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군정부를 조직할 때 서일, 현천묵, 김좌진, 계화, 이장영, 김규식, 이범석 등과 간부급이 되었다.

북로군정서에서 십리 평에 설립한 사관연성소 학도단장이 되어 사관생도의 단기 교육을 실시하였고 1920년 8월부터 김좌진의 부관이 되었다.

1920년 10월18일 일본군 3개 대대가 습격을 감행할 때 산림지역에 미복하고 임전태세를 갖추고 청산리 일대에서 전개된 항일독립 전쟁에서 대 승전한 100주년(1920년 10월 21일)을 이루었다.

일본군의 추격을 벗어나 노령으로 피신했다가 1922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다시 만주로 귀대했다.

1924년 1월 이범윤의 대한독립단에 들어가 김좌진, 신일헌, 최대갑, 한함산, 조생갑 등과 동참하고 북노군정서 행정부장이 되었다.

1925년 3월 신민부를 조직할 때 대한독립군단 대표로 참가하고 신민부의 보안사령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신민부에서 목릉현 소주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고 속성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백종열과 함께 교관으로서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민부에서 소련과의 교섭을 위하여 공산당 극동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톡에 파견되었으나 1927년 체포되었고 1930년 고루지계에서 피살되었다.

일경의 비밀 정보에 의하면 1932년 1월 본적지의 친형이 모스크바로부터 서신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1977년 박영희 선생의 공적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20년 10월 국가보훈처에서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해 각종 기념식과 전시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일시 중단되었다.

박영희 선생의 공적을 나타낸 문서가 수없이 많다. 그중에 <고등경찰요사>, <무장독립운동비사>, <명치백년사 총서>, <국외용의 조선인 명부> 김승학의 <한국 독립사>등이며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 4권 658~659면에 기재되어 공적이 심대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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