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김동리의 부인과 ‘십진분류법’
칼럼-김동리의 부인과 ‘십진분류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0.27 15:5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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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
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김동리의 부인과 ‘십진분류법’

남성과 여성을 내면에서 외면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참 어려웠다. 기증자는 은행 부채를 계기로 휴면 상태로 들어간 뒤, 김동리 문학관이 표기 상태로 수면 위로 부상하는 것이다. 문학관부지를 기증해 놓고는 은행에 담보로 돈을 차용하고 안 갚아서 건축을 못 하고 포기하게 되었다. ‘생각에 기능이 떨어진 뇌졸중으로 합법성에 족쇄를 채워 의족(義足)이 낀 것처럼 답답함으로 세월만 보냈다’ 문학관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김동리 선생의 발자취 때문이다. 그리고 함께 11년이란 다솔사의 연구된 학문들이 배제할 수 없는 역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최범술, 한용운, 김범부, 김범린의 독립정신과 고난의 업적을 보존하기 위해서이고, 필자의 소설<갈등>(김동리 일대기)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새로운 기증자의 참여로 김동리 문학관에서 한국 ‘경남종합문학예술관’으로 명칭을 탈바꿈 한다.

이날까지 김성은씨 때문에 답보 상태로 있던 것이 물꼬를 터서 다솔사 근처에다 문학관 유치를 희망했으나 너무 선(先)을 고집하다가 다른 곳도 놓칠 과정에 직면하여 사천 곤명 완사를 지나 진주 나동 근처라도 문학관의 비중을 고려해 한국 아닌 세계화로 나가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김동리 선생은 1990년 7월 30일(78세) 뇌졸중으로 투병이 시작되어 1995년(83세)에 영면하셨다.

그 뒤를 이어 둘째 부인 손소희 작가는 본부인과 이혼하기 전 에 재혼을 한 셈이다. 난소암으로 1987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진리를 흘러가는 대로 밝히면서 죽음의 허무함이 하루하루 생활의 용기를 얻어서 할 수 있다고 본다. 손소희 작가는 1917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태어났었다. 병을 얻은 손소희 여사가 서영은 작가를 따로 불러, 한 말은 김동리 부탁이었다. 그해 봄 서영은이 서울 정릉 봉국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먼저 서영은이 김동리 선생과 만나게 한 실제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니 작가 박경리였다. 필자가 청담동을 방문했을 때는 셋째 부인 서영은 작가와 살고 있었다. 김동리 선생은 단편 <인간동의>이 워낙 유명한 작가이고 보니 많은 정보를 가지고 생애에 호기심을 자아낼 수 있도록 증언, 평을 전하고 있다. 필자는 서울 자택을 수차례 방문했다. 작가로 나가는 데 재능적인 면을 교육적으로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였다. 초년생으로 뜻을 품고 소설을 수업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설을 접어두고 시와 수필을 쓰는 것이 좋겠다는 명언을 전수 하셨다. 대학 시절 학보에 ‘대기병’이란 제목으로 2년간 연재를 하였던 글을 읽어 보고는 내린 숙제였다. 그날 마침 초년생 박경리가 집을 방문하였는데 가르침에 대한 미련의 시절 등단시키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고, 그의 습작시를 가지고 왔을 때에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충고하시면서 냉정하게 평가하여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했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되어 박경리를 단편 ‘계산’으로 등단하게 했다.

그때 같이 시간을 두고 박경리, 한말숙, 문순태 등을 등단시켰는데, 특히 박경리를 제일로 가르치고 아끼는 정든 제자로 보고 있었다. 그다음에는 박경리의 소개로 김동리 선생님이 서영은의 글재주를 평가하여 좋은 글을 지도해 주고 등단 되게 했다. 이때부터 추천되어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다음 정식 결혼하였는데 셋째 부인이다. 강릉에서 작은 도서관 명예 관장직을 맡고 있다. 순수하고 어쩌면 어리숙한 모습과 인상이 매력적인 포인트다.

‘우리 몸은 잘 맞아요’ 인터뷰의 제목이다. 1968년에 등단 됐다. 본관은 달성이다. 지금은 유명작가로 활동 중이다. 김동리보다 30살 연하인 그는 꽃이 피고 지고, 씨앗으로 반복되는 흐름을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으로 자기 삶을 말한다. 내가 살아가는 고집의 내면에서 형성되어가는 운명이 결정되어가는 것 정도로 말한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의 속마음에서 오는 김동리의 순수한 작가 정신과,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정신, 고난의 한반도 현대사가 이런 근본 이치를 증언한다.

지금부터 101년 전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힘이 곧 정의’라는 제국주의 행패에 온몸으로 저항했다. 그리고 종교의 만남이 나를 이끄는 힘으로 본다. 김동리 선생은 도서관에서 사서로서 교수와 학생들에게 문헌을 제공하는 필자의 직업이 너무나 부럽다고 전했다. 미국이나 영국 유럽의 나라들은 사서의 직업을 우대한다는 것이다. 글을 쓰는 집필가들은 필히 십진분류표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잊지 못하는 것은 1986년 가을 김동리, 이병주, 황순원 작가 집을 방문하였을 때 학문적으로 이어져 있는 도서를 3만권 이상의 장서를 분류순으로 작업이 되어 활용하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는 분류전개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 발전에 있어서는 독립성이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분류법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어려움이 뒤따랐음은 물론이거니와 이를 극복하고 하나의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도서관 사서들의 투철한 사명감(使命感)과 숨은 능력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며, 우리 도서관 인들이 쌓아 놓은 하나의 찬란한 금자탑(金子塔)이 아닐 수 없다. 김동리 선생은 책의 자료들이 가정이나 연구실에서 책 만권이 소장되면 분류법을 참작하는 것이, 학문의 주제로 자료를 쉽게 접근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어느 작가는 자기 소장도서가 3만권이 넘는데도 어떤 때는 자료를 못 찾아 헤맨다. 색인도 있어야 되지만 류별(류벨)로 진행하여도 된다. 한국 십진분류법(韓國十進分類法) 초판(初版)을 제정하여 펴낸 것은 1964년 5월 31일이다. <한국십진분류법(KDC, Korean Decimal Classification)> 초판을 탄생시켰고, 우리나라 표준 분류표이다. 는 분류전개의 바탕이 듀이십집분류법을 주로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제정당시 <듀이십진분류법 (DDC)>의 (Dewey Decimal Classification) 듀이 미국의 도서관학자 Melvil Dewey이 고안된 십진분류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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