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어디서 또 무슨 별이 되어 만나려나
시와 함께하는 세상-어디서 또 무슨 별이 되어 만나려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0.28 15:0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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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어디서 또 무슨 별이 되어 만나려나

경전(經典)인 듯 밤새워
밤님 모시던 사내
곤히 앉았다.
득도(得道)한 그의 몸 광채가 돈다
기름이 반질반질
잡았던 긴장 놓으니 천지(天地)가 여관인데
빛나는 머리
좌우(左右)로 까닥까닥
화두(話頭) 던지자
옆자리 아낙 불립문자(不立文字) 받아
잽싸게 삼십육계(三十六計)
무아지경(無我之經)이니 만법(萬法)이 일귀(一歸)인데
측은히 바라보는 중생(衆生)들
코로
경전을 들려주니 그제야 미소 돈다
보살님 방 넓으시다

(서상영, ‘어디서 또 무슨 별이 되어 만나려나’)

이 시는 현대 시답지 않게 한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시적 분위기로 볼 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재미있는 시다. 밤새워 밤님을 모셨다는 사나이, 누구지? 야간근무를 한 사람, 밤새 청춘을 사르던 사람, 아무튼 이 사람이 전철 안에서 곤히 졸고 있다는 부분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광채가 돈다, 기름이 반질반질한다. 아하! 이 사람 분명 빡빡 깎은 머리다. 그래서 천정의 전등 빛이 반사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사람 밤새 클럽에서 청춘을 사르던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밤새 몸을 혹사했으니 당연히 피곤하여 앉은 채, 천지가 안방인 양 잠이 들었다는 이야기…

잠자는 모습 또한 가관이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다 옆에 앉은 여인의 어깨를 빌리게 되고 놀란 여인은 그 화두가 가진 뜻을 모르고 놀라 황급히 달아나는 장면,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에는 전혀 말을 나누지 않고 (불립문자(不立文字))에 의해 주고받은 행동으로 이걸 불교 선승들이 나누는 불법의 전승에 비유를 두고 있으니 무척이나 해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유독 한자어를 많이 동원하고 있다. 그것은 비유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무아지경(無我之經)’은 ‘(無我之境)’과 동음이다. 세속적인 무아지경을 불교의 경(經)’으로 교묘히 위장하여 종교의 근원적인 차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서술방식이 재미있다. 이어서 생전에 만공(滿空) 스님의 화두였던 ‘만법귀일(萬法歸一)하면, 일귀하처(一歸何處)오’ 즉 ‘온갖 법이 근원적으로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라면 그 한 곳은 어디인가?’라는 한 차원 높은 불승(佛僧)의 화두를 교묘히 동원하여 희화화(戲畫化) 하고 있다. 어휘로 본다면, 당연히 중생들은 존경의 눈으로 올려봐야 마땅한데, 측은한 눈으로 내려 본단다. 그것은 밤새 밤님을 모신 젊은 청춘을 낭비한 자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시선일진대, 이어지는 경전(설법)이 내용의 정점을 찍는다. 그것은 밤님을 모시던 사내가 들려주는 법문인 코 고는 소리로 전철 속에 있는 모든 중생에게 웃음꽃을 돌게 했으니 그 설법이야말로 최고의 설법이요, 최대의 설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 보살님이 법문을 설하시는 방이 넓고도 넓을 수밖에…그러니까 여인의 어깨를 빌리려던 것은 전혀 나쁜 의도가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시는 이런 맛이 있어야 한다. 그냥 아무렇게나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이렇게 삶의 활력소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무조건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만 남들에게 강요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의미가 있어야 시에 대한 독자들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서상영 시인의 <어디서 또 무슨 별이 되어 만나려나>는 멋진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빛나는 머리/ 좌우(左右)로 까닥까닥/ 화두(話頭)던지자/ 옆자리 아낙 불립문자(不立文字)받아/ 잽싸게 삼십육계(三十六計)’라는 표현은 자신도 모르게 저질러지고 있는 졸고 있는 사람의 폐단을 피해 달아나는 아낙의 모습이 그려져 절로 웃음 짓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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