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로맹가리의 벽
아침을 열며-로맹가리의 벽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1.10 13:46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영/소설가
강영/소설가-로맹가리의 벽

로맹가리의 벽을 읽었다. 단편소설이라기보다 콩트라고 해야 할 짧은 소설인데 읽기를 마치고 한동안 멍 때리다가 슬그머니 로미오와 줄리엣이 내 속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사랑했지만 원수지간인 양쪽 집안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고 그것을 비관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목숨을 버린다. 귀한 자식들을 잃고 나서 두 원수 집안사람들은 진작 화해 못한 걸 심하게 후회했을 것이다.

벽을 읽고 나서 한동안 멍 때린 까닭은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소설 속 두 주인공이 옆에 있었다면 이 미련 곰탱이 들아, 라고 나무라며 꿀밤을 먹였을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이라도 했지, 벽의 두 사람은 뭐냔 말이지. 사랑은커녕 서로 한번 불러도 못 봤으니. 결국 마지막엔 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원망하고 증오하고 혐오했으니 저승에서 만나도 껄적지근 하겠지.

벽의 두 남녀 주인공은 빈민촌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둘 다 노처녀 노총각으로 가난하고 외로운 독신이다. 이 두 사람이 생을 마감하는 12월31일 밤에 벌어진 일을 전해주는데 고독과 외로움이 절절하다. 밖은 찬바람이 몰아치고 노총각 남자 홀로 있는 집안 역시 썰렁하기 그지없다. 이제 몇 시간 지나면 새해가 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더 좋아질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기에 남자는 견딜 수 없이 절망했지. 특히 며칠 전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부터 돈도 가족도 없이 고독하기만 한 처지를 참을 수가 없었거든.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났다고 생각했지.

그날 밤엔 하필 벽 저쪽 옆방에서 이상한 소리까지 들려왔던 거지. 남녀가 단 둘이 있어야만 날 수 있는 그런 소리 말이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가 막힐 일이지. 게다가 옆방의 여자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봤는데 ‘천사 같은 여자’(남자의 말)였지. ‘너무도 예뻐서 감히 말도 걸지 못했던’ 그녀가 그런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죽어버리기로 결심하고 커튼 줄로 스스로의 목을 조였어.

사망확인을 위해 남자 집을 방문한 의사가 그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죽은 남자의 유서를 읽으며 이 일이 밝혀진다. 의사는 남자의 유서를 읽고 이제는 조용한 옆방 여자가 궁금해 집 주인 도움으로 그녀의 방문을 열었고 비소중독으로 죽은 그녀를 발견했고 그녀의 시체로 죽기 전 한 시간가량 신음하며 몸부림쳤다는 사실 역시 밝혀지고. 그녀도 고독과 외로움에 자살했던 거지.

아,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보다 살아있을 때 살기는 또 얼마나 힘에 부쳤을까. 사랑하는 여자에게 말도 못 붙인 남자도 얼마나 가여운가. 미련 곰탱아, 곰탱아! 말이라도 해보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