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김동리, 최범술과 다솔사
도민칼럼-김동리, 최범술과 다솔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1.10 13:4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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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
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김동리, 최범술과 다솔사

광명학원은 효당 최범술이 1930년 민족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세운 학당이다. 사간 목조건물로 7년간 유지하다가 1937년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당시의 교사는 우리나라 문단의 거성인 전 예술원 원장 김동리와 언론계의 중진 신아 통신사 사장 이상권 등이 폐교시까지 교편을 잡고 있었다. 최범술(1904-1979) 이름은 영환, 법호는 효당이고 사천 출신이다. 1915년 곤양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다솔사로 출가했다.

1917년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하고 환경(幻鏡)을 은사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승려,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 등 다양한 직분을 수행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필자는 그 직분의 다양한 발자취를 ‘곤명면지’를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그 넓이와 깊이가 제대로 잡혀질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지역의 일꾼들이 찾아낸 자료와 김동리의 살아있을 적 역사적인 이야기와 곤명 3대 면장 황증열의 살아 계실 적의 기록물, 초암 최정렬 제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다.

일제 강점기의 고통을 대강 참작을 한다. 서기 1933년 효당 최범술 만해 한용운, 김범부, 김법린 등 독립지사는 만당 결사본부를 서울에서 일경 감시를 피해 다솔사로 옮겼다. 이 무렵 독립운동 자금 조달기관인 백산 상회의 연락처가 다솔사였다. 6.25로 인하여 서울이 피점 지역이 되자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서울 피난길 소재의 동흥중학교가 피난학교로서 1951년 다솔사에서 개교하게 되었다. 3년여 개학을 했고 현재 70대 장년 중등교육을 이수한 자는 거의가 이 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는 1954년 환도로 복귀해 갔다. 다솔사 최범술 주지의 배려로 전시학교를 구성하여 지역사회 중등교육에 큰 자취를 남겼다.

1933년에 불교전수학원을 효당이 개설하여 강사진은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등으로서 많은 후학을 배출시켰다. 강사진은 쟁쟁한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 건국과 더불어 요직을 맡았으며 건국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고 또한 곤명의 후진교육에 공헌한 바 컸다. 교육의 여건이 열악한 때에 비록 불교전수학원이지만 청소년교육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이 분명하다. 이상의 면내 교육현장을 보면서 최범술 주지가 얼마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이후 그가 이룬 교육적 공헌을 주목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최범술 주지의 독립운동 대목을 정리해 보자. 1904년생으로 서포면 율포리에서 출생했다. 1915년 개진학교 재학 때 일인 교사 기다무라 배척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빈기홍, 성엽 등과 함께 퇴학을 당했다. 사천 편모지에 의하면 이 일로 검거되어 진주 헌병대에서 문초를 받고 있을 때 최범술에게 집에 전할 말을 물을 적에 그는 ‘부모님께 독립운동을 성공하지 못하고 뼈를 남기게 되니 불효 막대함을 전해 달라’고 했다. 그때가 15세라 헌병이 어이가 없어 석방했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1916년 다솔사에 입산하여 1917년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했고, 이후 합천군지에서 관련사항을 발췌하여 본다. 1919년 3.1독립선언서를 박근섭, 최인형으로부터 전달받은 최범술은 이를 해인사 지방학림에 알리고 3만여매 인쇄하여 강재호, 김봉률, 기상섭은 경주와 통도사를 맡고 최범술, 송봉만 등 5인은 합천 의령, 진주, 사천, 하동 등지를 무대로 하여 크게 활약했다. 일경의 검거 선풍이 일자, 최범술 등은 지하로 들어가고 강재호 송봉만 등 10여인은 김좌진, 지청천의 신흥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독립군에 가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30년 만자당이 결성되자 최범술, 김법린, 박근도 등 18인은 한용운 아래서 활약했다.

이를 안 해인사 주지 변성호의 밀고로 최범술 오제봉 등 30여명이 거의 투옥되었고 일경의 악형은 드디어 이극경을 일제 장하에 참사를 보겠끔 했다. 출옥 후 최범술 등은 다솔사에서 불교 강원을 세워 원생에게 민족 주체 교육에 힘썼다. 그후 조선어학회 사건에 최범술, 김범부, 김법린 등은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었다.

이상은 합천군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최범술 독립운동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1923년 일본에서 박열을 정점으로 하여 박흥곤, 육홍균 등과 함께 선인사를 결사한 바 일관헌에서 대역사건으로 관련시켜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출옥 후에도 경찰의 단기 감시는 3년간 계속되었다. 박열 지사기(志士記)에 최영환의 이름은 최범술의 당시 칭명이라 한다. 한용운이 결성한 만당 비밀결사가 다솔사로 옮김은 최범술이 다솔사 주지 취임이 계기가 된 것이고, 당시 함께 일한 동지로는 김범부, 김법린, 오제봉, 문영빈 등과 민선 경남지사였던 기주, 참의원으로 진주지방 예술제의 선구자인 설창수, 제헌의원 강달수 등도 동참했다.

최범술은 8.15해방후 제헌국회의원으로서 정계에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교육계에도 투신했는데, 국민대학 학장, 해인대학 학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또한 다솔사에서 생산되는 작설차를 특유의 법제로서 그 향미는 국내에서 따를 수 없다 했으며 한국 다문화의 시원지 의미를 담아 5월25일이 ‘다의 날’로 제정된 것도 최범술의 주장에 의한 것이라 한다. 제자 정원호가 다선회를 창립하여 제다 비법을 전수받아 한, 일, 중 다문화 교류를 이루고 있다. 다솔사 주변 생산되는 차를 반야차라 하고 쌍계사 주변 생산되는 차를 죽로차라 하며 무등산 주변 생산되는 차를 설록차라 부른다. 문학에도 박식하여 한국의 다도, 사찰장경 원효교학 연구, 반야심경 주해, 십문화쟁론, 해동소 한용운전집 등 많은 저서를 남기고 1979년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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