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일(國慶日)과 국치일(國恥日)
국경일(國慶日)과 국치일(國恥日)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9.0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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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주/국학원 원장·한민족역사문화공원 원장

대한민국의 4대 국경일(國慶日)은 법률로 지정한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로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이다. 국경일은 각 관공서와 가정마다 태극기를 달고 온 국민이 축하 하도록 돼 있다. 나라의 운명이 경사롭게 변하고 열린 절기라는 의미로 ‘절(節)’자를 붙인다.

우리는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으나 수 천년 동안 나라를 빼앗기지는 않았지만 구 한말 결국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야 말았다. 일본은 1905년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를 억압해 강제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한다. 결국 5년 뒤인 1910년 8월 29일, 일본에게 나라를 완전하게 빼앗기니 이 날이 ‘경술국치일(庚戌國恥日)’이다.
그러나 뭐라 해도 가장 큰 이유는 우리 자신이 자주적인 역사, 문화, 철학의 정수인 국학(國學)을 버리고 점차 남의 사상과 정신으로 살아가면서 국혼(國魂)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34년 11개월 16일 간, 일본의 악랄한 지배 속에서 온갖 만행에 시달렸다. 일본의 항복으로 1945년 8월 15일 나라를 되찾으니 바로 ‘광복절(光復節)’이다. 그 암흑과 질곡의 35년을 조선의 유, 무명의 지사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땀과 눈물과 피로써 고난의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1842~1910)선생은 공조 참의에 올랐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후 후학 양성에 힘을 쏟던 중,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일어나자 의병활동에 투신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9월 17일 단식을 시작해 24일이 되는 10월 10일(음 9. 8)에 목숨을 스스로 거두어 순국한다. 이에 동생 만규와 아들 중업도 의병에 참가해 1910년대에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그의 며느리이자 큰 아들 중업의 부인인 ‘김락(金洛)’은 ‘대한의 어머니’로 불리 울만한 여성지사(女性志士)로서 향산의 자정순국과 지아비, 아들, 사위, 큰 오빠 김대락, 큰 형부 석주 이상용, 큰 언니의 결사적인 독립운동을 함께 하다가 3.1 만세운동에 참가해 두 눈을 실명한 채로 고생하시다 10여년 뒤 돌아가신다.
경술국치일로 부터 102년 우리는 세계의 주요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이러한 국제적인 격변기에 우리가 아직도 스스로 비하하는 의식에 사로 잡혀 있다면 일제 식민주의가 남긴 정신적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완전한 독립은 정신과 문화의 독립이며 이것이 진정한 광복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의 어떤 정부도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것이 우리 국학의 현재의 모습이다. 국학의 중요성을 모르는 나라, 국학을 2세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지금 우리가 다시 국학을 부활시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정신문화는 영영 사라질 것이다. 이제 국민들과 이 나라를 이끌어 가려고 밤낮없이 노력하는 대통령 후보들에게도 진심으로 고한다. 모든 후보들은 빠짐없이 대한민국의 바른 국민성과 그 속에 깃든 국혼(國魂)을 본인이 먼저 바로 알아 깊이 이해하고 그 뜻을 널리 중흥시키기 위하여 국학(國學)의 뜻을 바로 세워야한다. 우리의 반만년의 역사, 문화, 철학으로 이어온 광대한 국학 속에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국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의 힘’은 어느 민족도, 어느 나라도 지구와 인류보다 중요하지 않고, 크지 않다는 ‘지구인으로서의 자각’ 에서 비롯된다. 지금은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지구와 인류를 위하여서는 진정한 지도자와 그런 지도자를 정확하게 선별할 수 있는 국민의 자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체절명의 중차대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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