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한용운, 만당 독립운동 다솔사
칼럼-한용운, 만당 독립운동 다솔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1.24 16:1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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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
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한용운, 만당 독립운동 다솔사

독립운동 단체인 만당(卍黨) 결사에 대한 기록을 보자. 만당은 불교 혁신운동을 표방하고 이면에는 민족의식 함양과 배일 운동에 주력하는 데 있었다. 다솔사가 만당의 본거지가 된 것은 서울에 있던 단체가 일제 강압이 날로 심하여 감시망을 피하여 한용운이 다솔사에 은신하게 됨에 따라 자동적으로 다솔사가 중심이 된 것이다.

국내 독립기금 조달기구인 백산상회의 상인들이 내왕했던 숙사가 역시 다솔사였다. 구국운동의 선구자 만해를 위시하여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문영빈, 오제봉, 설창수, 강달수, 이기주 등은 후일 건국이 되자 제헌의원 장관 참의원 지사 등을 역임한 쟁쟁한 독립지사로 우리나라 건국사에 이름이 길이 남을 인물이다.

1933년 만해의 회갑연 기록을 보자. 1939년 만해의 회갑 축하연은 다솔사에서 최범술, 김범부, 김법린, 문영빈 등이 주재하였고 기념 식수한 황금 편백은 지금도 경내에 3그루가 남아 있다. 1944년 입적한 연후 1948년 ‘한용운전집’ 간행위원회가 최범술, 박광, 박영희, 박근섭, 김범린 등으로 발족되었으나 끝난 뒤 6.25사변으로 중단되었다가 전란이 끝난 뒤 조지훈, 문영빈이 새로 참가하여 사업 진행 중 사회불안으로 다시 중단되고 3차 간행위원회가 최범술, 민동선, 김관호, 문후근, 이철우, 인권환, 박노준, 이화영, 조위규 등에 의해 구성되어 1973년 전6권이 간행되었다.

한용운이 쓴 소설, 수필, 시 중 일부를 적어보면 고통과 쾌락, 고학생, 님의 침묵, 심, 명기 항진, 소작 농민의 각오, 선과 이생, 현대아메리카의 종교, 선과 자아, 시베리아로 거쳐 서울로, 후회, 철백 미인, 불교와 고려 제왕, 태고 등이다. 이 작업의 중심에는 최범술이 놓여 있다. 그만큼 인연의 끈이 누구보다 더 질긴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한용운 1936년 ‘심우장 만필-반성(反省)’ 서울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尋牛莊), 한용운이 1933년부터 광복 1년 전인 1944년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1937년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순국하자 한용운은 그 유해를 이 심우장으로 운구해 장례를 치렀다. 한용운은 평생 단 한 번 이 장례식 때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 3·1운동 공판에서 1920년’ 어떤 나라든 자멸하는 것이지 남이 망하게 할 수는 없다. 국가의 흥망은 일조일석에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나라든 자기가 스스로 망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가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존심이 있는 민족은 남의 압박만 받지 아니하고자 할뿐 아니라 행복의 증진도 받지 아니한다. 카메라에 각인된 당당함 체포된 민족대표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카드용 사진을 찍고 재판을 받았다.

우리 문학사에서 만해 한용운, 이상화, 이육사, 윤동주 등의 시인을 민족시인라 부른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민족이 지켜야 하는 자존을 끝까지 지킨 시인이다. 이른바 항일민족 시인인 것이다. 무슨 힘이 이들을 도왔을까? 한용운은 스님으로서 갖는 실천정신을 어렸을 때부터 키워나가 불교 유신론이나 개혁 실천에 몸을 바쳤다. 시집 ‘님의 침묵’만 보아도 전편이 님에 대한 일관된 정신으로 불타는 시심이다. 기미 독립 민족대표 33인이고 그중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불퇴전의 올곧은 정신을 지켜낸 것이다. 이육사는 <광야> <절정> 등을 쓰면서 최고의 저항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 힘을 어디서 얻은 것일까? ‘이육사 평전’에 의하면 가문에서 바라는 바의 ‘규모’를 지켜낸 것이라고 말한다. 규모가 무엇인가. 가문이 수용할 수 있는 품격, 지조, 실천 사상 등에 유의한 것일 터이다. 저항을 가문이 필요로 하면 저항을 하고, 목숨을 내걸기를 가문이 지적하면 목숨을 내거는 것, 그것이 규모가 아닐까 한다.

이육사문학관에는 16년 동안 일제에 17회 잡혀가서 끝내는 피투성이로 돌아온 그 피 묻은 옷이 보관되어 있다.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자라면서 북간도의 민족주의와 기독교 사상을 터득하였기에 그 규모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가 끝까지 일제의 회유를 받았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가 십자가를 알았고 그 희생의 값진 피 흘림을 알았으므로 그는 민족의 문학사에 순교한 것이었다. 어찌 그가 거룩하고 숭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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