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어떤 고백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
시와 함께하는 세상-어떤 고백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2.02 15:0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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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어떤 고백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

봉제 인형을 작업대 위에 올려놓는다
​유기는 세계를 떠도는 전염병 같아​
복부를 가르면 상실이 보인다
​이건 가장 순수한 솜사탕에 대한 발견​
파헤치면 녹음된 음성이 흘러나올 것 같은
​사랑해, 사랑해 말해줄 것 같은​
누군가의 가슴을 달콤하게 했던 기록일까
​출처 없는 고백을 뜯어내면 ​
소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솜뭉치를 솜사탕이라 말하면 ​
너의 복부를 베고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더는 찢기고 갈라지지 않는 ​
무결한 형태로
​어떤 고백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
이별을 모르는 인형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 ​
눈을 감지 않고 안식을 말할 수 있겠다

(김미소, ‘봉제 인형’)

마치 청소년의 꿈과 애환을 정서적으로 잘 어루만져주던 80년대 서정윤의 시를 다시 보는 듯하다. 시인 김미소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시풍을 잔잔히 뜯어보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억눌렸던 꿈과 억눌림을 속풀이로 대신했던 소년 시절의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물론 속풀이라는 것은 소년의 시각에서만 보일 수 있는 이상과 현실에서 찾아오는 괴리 점이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제 인형의 대명사는 곰 인형일 것이다. 속에는 솜을 잔뜩 집어넣은 봉제 인형은 웬만한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들은 다 가지고 있으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 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시절 자신의 넋두리를 풀어내는 존재로 많이 활용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는 봉제 인형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자라버리면 쓸쓸히 구석으로 버려질 것이고, 그러다 어느 날 시인은 그 버려진 봉제 인형을 발견하고는 추억에 잠기게 될 것이다.

하얀 솜사탕 같은 솜을 끄집어내고 나면 작은 버튼이 나오고 외로울 때마다 그 버튼을 누르면 언제나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녹음되어 흘러나왔던 ‘사랑해’라는 말이 생각날 것이다. 아무도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철없던 시절, 유일하게 내가 ‘사랑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시기에 정확하게 나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들려주던 봉제 인형의 추억이 부활하는 순간이다.

언제부터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도 생략한 채 내가 원하는 시점에서 전해주었던 ‘사랑해’라는 봉제 인형의 정형적인 말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픽 웃을 수준이겠지만, 가끔 지금도 솜사탕처럼 달콤했던 포근함과 따뜻함을 베고 잠을 잔다면 가장 편안하게 잘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봉제 인형이 정말 어린 시절에 느꼈던 감정이 지금도 그대로의 상태라면, 아아 나는 지금도 눈을 감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성장을 멈추고 어른이 된 어느 날 어떤 계기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그 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게 되면 특히, 어른이 되어 점차 순수성을 잃어가는 경우라면 어느 날 김미소의 <봉제 인형>을 읽어보라 어쩌면 잠깐이나마 그 시절의 다시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왜 그렇게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고 따뜻한 위로가 그리웠던지, 막연한 그 그리움이 왜 그렇게 궁금했던지, 그리고 그 그리움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왜 그렇게 외로운 존재라고 생각했던지, 또 왜 그렇게 누군가에게 나의 속마음이 들킬까 두려웠던지 지금은 알 수가 없겠지만, 그러나 그 시절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그러면 당신은 다시 김미소의 <봉제 인형>을 감상해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다시 그때 그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오랜만에 내 어린 시절을 기억나게 해준 기회를 마련해 준 시를 한 수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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