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김범부의 동양사상론(풍월도), 김동리
칼럼-김범부의 동양사상론(풍월도), 김동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2.08 13:4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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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
황규홍/김동리 다솔문학 협회 회장ㆍ시인ㆍ작가-김범부의 동양사상론(풍월도), 김동리

김범부의 교육이나 글을 시작하면서 먼저 한 가지 양해를 구한다. 이 글에서 의사소통의 편의를 위해 그냥 범부(凡父)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수은 만해를 경칭 없이 부르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는 데는 오늘을 사는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하려는 뜻도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 세상을 떠났다.

다솔사를 정점으로 하여 서로의 역사적인 인연으로 이어진 바탕에서 언저리를 잡아 문학정신 윤리 정신 독립정신을 뽑아 깊이를 새기려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을 범부 연구자들과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자료적인 면에서 그리고 김동리의 일대기 영화를 제작하는데 약간 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미 드러났듯이 나는 범부 자신과는 세대의 면에서 큰 차이가 있고 거기에도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살아온 과정과 공부의 내력 적이고 하는 면에서도 거리가 있다. 풍류도(風流道)나 동방학(東方學)과 같은 주제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너무도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울러 남아 있는 범부 관련 자료가 워낙 소락하기 때문에 지금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더라도 기록으로 형과 동생을 시점을 비교하면서 남겨두면 경우에 따라서는 목이 마른 연구자들에게 어떤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지게 된다.

범부의 이른바 ‘오증방법론’은 그의 ‘국민윤리 특강’ 가운데 나온다. 이상의 후보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겨우 붙잡아둔 범부 사상 콘텐츠의 전부이다. 나머지는 최범술 스님, 오종식 주필, 황산덕 교수, 이항령 교수, 이종익 교수, 이종후 교수, 이완재 교수, 김동리 작가, 서정주 시인, 박목월 시인을 비롯하여 수많은 수신자의 귀로 흘러 들어가 그들이 사상적으로 성장하여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데 지침이 되고 자양분만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부분은 공중으로 흩어져 허공의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것이다.

또는 우리 겨레의 생각과 느낌의 체계 어딘가에 녹아있을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범부는 최범술 스님, 한용운 독립운동가, 김범린과 김동리의 학문적 인간 행동을 규정하는 도덕, 관습, 종교, 법-도덕이 부재한 자연 생태에서도 협의할 수 있는 무엇이 과연 있는가? 김범부의 동양사상론(풍월도), 김법린, 현대불교학, 만해의 불교 유신론 동양학의 뿌리를 섭취했고 광역권 동양학의 범주를 채우는 요소가 되었다. 말하자면 다솔사와 이들의 숭고한 교육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훈계를 한다.

인간의 기본 조건 힘과, 욕구의 동일성, 의식주 등 욕구의 대상이 겹쳐 갈등을 빚게 되는 인간, 자원의 희소성, 이기적 존재 인간, 인간의 4가지 조건을 갖춘 자연 상태는 상상력의 산물 현실성이 떨어지면 감동과 공감을 얻지 못하는 스토리,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모두의 멸망 통찰을 통해 각자의 자유를 포기해야 평화가 존재한다. 평화를 추구하라 그것이 불가능할 때 전쟁을 준비하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생각은 각양각색이다.
나아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염치고 체면이고 다 사라져버렸다는 한탄도 흘러나온다. 모든 것이 난마와 같이 얽혀 있다는 해묵은 진단도 되풀이된다.

이를테면 높은 사람이고 낮은 사람이고 할 것 없이 개인적인 욕심에 차 있으며 법에서 유죄 판결만 받지 않으면 무엇이나 다 하려고 하고 또한 그와 같은 시도가 허용되기도 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대학교 문헌정보과 전 김정근 교수가 쓴 <金凡父의 삶을 찾아서>에서 범부의 생전에 “이것이 과연 제 나라 살림을 사는 사람들인지 남의 나라 살림을 사는 사람들인지 분간이 서지 않는다”, “식민지 백성의 티가 이렇게도 끈질기게 남아 있구나” 등의 말씀을 자주 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사정이 바로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야 도대체 멋이 없지 아니한가. 이렇게 떼쓰는 판이 되고서야 선량한 백성이 그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을 것인가? ‘동방의 르네상스’는 범부가 생전에 사용한 표현이었다. 동생 동리의 시작은 어떠한가? 김동리 선생은 한국 근대문학 소설사에서 우뚝 선 거목(巨木)으로 왕성한 문단활동과 함께 획을 그으셨던 분이다. 1934년 조선일보에 시 <백로>로 입선하고 1935년 단편소설 <화랑의 후예>가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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