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재미있는 자동차 이야기(4)
현장에서-재미있는 자동차 이야기(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2.20 14:38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원태/제2사회부 창원본부 취재본부장
최원태/제2사회부 창원본부 취재본부장-재미있는 자동차 이야기(4)

요즘 시내버스가 경유버스 CNG천연가스 전기버스 수소전기버스가 운행하면서 버스 승객들도 실내 환경이 쾌적해지고 승차감이 좋아졌다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오늘의 버스가 있기까지 승객들은 많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버스가 인기를 끈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한국전쟁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한국전쟁 이후 버스 승객이 꾸준히 늘기 시작해 1957년에 드디어 전차 승객보다 버스 승객이 많아졌다는 기록이 있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버스는 마이크로버스와 미군 트럭을 개조한 버스여서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그러면 지금 같은 버스는 언제부터 운행되었을까? 국산 시내버스 최초의 모델은 1967년에 나왔는데 이 버스는 1970년대까지 많은 인기를 누렸다. 당시 버스는 차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185cm 정도여서 키 큰 사람은 구부정하게 서야 했다.

좌석은 창문을 따라 길게 배열돼 있는 데다 버스 길이가 요즘 버스보다 짧아서 사람이 조금만 타면 꽉 차기 일쑤였다. 그래서 버스를 콩나물시루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예전 버스는 운전석 옆에 엔진이 있었다.

당시의 시내버스는 프런트 엔진 방식이어서 엔진이 앞에 있었는데 운전석 옆에 엔진룸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엔진룸 덮개 위에는 책가방이나 짐을 놓기도 하고 사람이 앉기도 했는데 겨울에는 따스한 엔진 열이 있어서 서로 엔진 룸 덮개에 앉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때만 해도 버스 문이 차체 한가운데 하나만 있는 게 보통이었는데 1970년대 후반 들어서 버스의 문이 두 개로 늘었다. 이때만 해도 사람이 직접 문을 열어야 했기 때문에 조금 불편했다. 그러다가 1985년이 되면서 뒷문이 자동문으로 바뀌었다.

문도 문이지만 당시의 버스는 타기가 참 힘들었다. 프런트 엔진 버스는 땅바닥에서 실내 바닥까지의 높이가 1m가 넘었는데 그래서 노인이나 어린이들은 등산하듯이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다가 엔진이 뒤에 붙은 리어엔진 버스가 나오면서 차체 앞부분의 높이가 낮아졌다.

그 차이가 무려 20cm였다. 그리고 전차가 사라지면서 시내버스는 유일한 교통수단이 되었는데 그러면서 버스는 항상 만원 운행을 해야 했고 심지어 출퇴근 시간에는 조리질 운전이라는 운전 기술까지 나왔다.

그건 어떤 운전 기술인가? 승객을 싣고 버스는 떠나는데 워낙 사람이 많아 문이 닫히지 않으면 차장은 ‘오라이!’ 소리와 함께 손으로 문짝을 쳐서 구조 신호를 보냈다. 그러면 버스 기사는 급히 핸들을 좌측으로 꺾었다. 그러면 승객들이 차 안쪽으로 쏠리게 되고 차장은 그 틈에 문을 닫았는데 바로 이것이 조리질 운전이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을 전후해 우리나라 버스의 개혁이 있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 버스 개혁이 이뤄졌는데 핵심은 선진국처럼 안내양 없는 버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버스 여기저기에 앞문 승차 뒷문 하차라는 스티커가 붙었고, 요금이 후불에서 선불로 바뀌었다.

버스 안내양은 1984년부터 사라지기 시작해 서울에선 1988년 김포교통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는데 당시 3만여 명에 이르던 버스 안내양들이 직장을 잃게 된 것이다. 버스 개혁은 이루어졌지만 90년대까지도 버스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그래서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여름에는 좌석버스가 붐볐다.

돈을 조금 더 내고서라도 에어컨이 있는 좌석버스를 탔던 것인데 그러다가 1995년부터 좌석버스에만 설치됐던 에어컨이 일반 버스에도 설치되었고 버스에는 냉방 버스라는 표지를 부치고 다니기도 했다. 또 버스 외관은 부드러운 유선형에서 현재의 사각형으로 바뀐 시기도 90년대 중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