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버지의 속력을 잊어버렸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버지의 속력을 잊어버렸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12.30 08:52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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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아버지의 속력을 잊어버렸다


차가 차 위에 와서 멈춘다
길을 기억하는 몸으로 산이 되고 있다
무수한 부품들이 녹슬어 다시 흙이 되고 있다

평생 단 한번도 차를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가
평생 단 한번도 세상 밖으로 걸어가 보지 못한 아버지가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떠났다

아버지의 걸음과 세상의 속력은
늘 반 발씩 어긋나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따라잡을 수 없는

아버지의 발뒤꿈치에는 결코 떼버릴 수 없는
세상 가장 무거운 내가 붙잡고 있어
아버지는 아버지의 속력을 잊어버렸다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속도로
나는 세상 모든 길을 달려왔다

모든 속력을 버린 차들이
가만히 편안하다

(주선화, ‘폐차장’)

차가 차위에 와서 멈추었단다. 그것도 산이 되어 높이 쌓여 있단다. 일부는 흙으로 돌아가고 있단다. 폐차장을 지나면 폐차한 차들을 압축하여 산처럼 쌓아놓은 것을 독자 제위께서도 가끔 보셨으리라. 그 차 오래되면 점차 녹이 슬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이치도 알 수 있으리라. 오래전 영면에 드신 나의 아버지도 점차 자연으로 돌아가고 계신다. 세상의 역할을 다한 차는 폐차되듯, 아직도 많은 부분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고, 여전히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기억 속의 아버지 역시 자연으로 돌아가고 계시다. 그러므로 중년에 들어서면 시간조차도 영원히 잡아두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리하여 그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생전에 아버지란 존재는 나에게 있어 영원할 줄 알았던 버팀목일 것으로 생각했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기 위해 항상 남들보다 느린 걸음을 걸으셨고 그 느린 걸음은 오로지 나의 걸음을 채워주시기 위함이었으며 나의 걸음을 채워주시기 위해 느려진 걸음은 언젠가부터 숙명처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끝내 아버지는 아버지의 보폭과 걸음을 완전히 잊게 되신다. 덕분에 나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빠른 지름길로 여기까지 달려 올 수 있었다. 반면에 아버지의 걸음은 불행하게도 내가 잡은 아버지의 발목만큼 항상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것이고 그 뒤처짐이 곧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낙오가 되었던 것이니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온 것 같지만 사실은 나의 힘보다 훨씬 많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 당연히 그 누군가는 아버지 즉 부모님이었을 것이다. 그 부모님께 당연히 살아생전에 고마움을 표현했어야 했는데, 시간이 많이 흘러버린 지금은 폐차장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차처럼 아버지도 자연으로 돌아가고 계신다. 하지만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아무리 오래전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미국의 시인 헨리 워즈워드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는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이 말은 영혼을 두고 한 말은 아니다”라고 했다. 삶과 죽음의 길이 아무리 다르다고 하지만, 시인은 아버지가 영원히 가슴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다만 그의 육신은 자연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점에 대해서 심한 공감을 한다.

오늘은 2020년의 마지막 날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지나온 이력들이 많이 생각났고 특히, 오래전 아버지가 무척 생각났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이 아버지의 그것이겠지만, 자식으로서 오늘이 있기까지 아버지의 역할이 당연하다면서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몰염치한 것 같아서 아버지와 관련된 시 한 편을 소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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