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감나무가 있는 마을
도민칼럼-감나무가 있는 마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1.14 16:2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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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선/시조시인·작가
강병선/시조시인·작가-감나무가 있는 마을

코로나19 확진자가 며칠째 500명을 넘고 있다. 작년만 해도 각종 모임행사와 문학 모임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나를 바쁘게 했다. 그러나 올 연말은 날마다 방안에 콕 처박혀 있어야 하니 그야말로 방콕이다.

오늘도 방안에 들어앉아 소설이랍시고 몇 줄 쓰다 보니 시원하고 달콤하게 와삭와삭 씹히는 잘 익은 단감이 그립고 먹고 싶어진다. 꿩 대신 닭이라는 말처럼 감 대신 사과를 먹으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아침에 아내가 깎아놓고 간 사과에는 손이 가질 않는다.

이처럼 과일 중에 무슨 과일이 제일이냐고 누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서슴지 않고 잘 익은 단감이라고 말하겠으며, 두 번째는 빨갛게 잘 익은 홍시라고 말할 것이다.

감나무는 물 빠짐이 좋은 사질토라면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과일나무다. 이처럼 내가 나고 자랐던 고향에도 감나무가 자라기 좋은 환경에다 토질도 맞았는지 고향마을에는 뒷산 자락이나 밭 언덕배기에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어김없이 감나무가 자리했다.

어렸을 때 산에 나무를 하러 가서 내려다보면 집안 마당에 담장을 따라 그리고 텃밭 어귀마다 감나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감나무 숲이 우거진 마을의 풍경은 꼬막껍데기를 엎어 놓은 것처럼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름다운 순천만 가정정원이 있는 순천에서 전라선 기차를 타고 가게 되면 괴목역과 구례 사이에 기찻길 옆에 자리한 아담한 고향마을이 있다. 그중 내가 나고 자라던 보금자리는 동요 속에 나오는 기찻길 옆 오막살이 집이었다. 이른 봄이면 병풍처럼 동네를 둘러싼 산에는 온통 발갛다가 진달래가 지고 나면 철쭉으로 붉게 덮어 버린다. 여름엔 온통 감나무 숲이 우거져 숲속나라이었으며 참매미와 왕매미들의 노래 경연장이 되기도 했다. 가을이면 지붕에는 하얀 박들이 알궁둥이 채로 뒹굴다가 부끄러웠는지 진초록 잎으로 반쯤 가리고 익어가고 있었다. 온 동네가 감이 붉게 익어가는 마을 앞으로 검은 기차가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면 그야말로 동화 속의 고향마을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보금자리는 오두막집이라 마당도 좁고 텃밭도 그리 넓지 못해 감나무를 많이 심지는 못했다. 아래채 옆에 단감나무는 내가 태어날 때는 이미 세월을 오래 묵은 고목이었다. 사립문 쪽과 텃밭 둘레로는 워래 감이라고 하는 품종을 아버지가 심으셨다. 그때 감 품종은 장둥감과 워래감, 두 품종이 주를 이루었지만, 우리나라 토종 감이 아니다. 사립문 쪽에 워래 감나무는 옆집 터에 일찍 심어진 어른 장둥감나무 때문에 바로 자라지 못했고 왼쪽으로만 자라는 기형 나무였다. 위가 뾰족한 모양으로 대봉감 크기보다는 조금 작은 감 맛은 정말 일품이었다. 빨갛게 익은 홍시를 따먹기 위해 늦여름부터 초가을 무렵에는 감나무에 무던히도 오르락내리락했었다.

마을에 단감나무가 있는 집은 서너 집 정도라, 우리 집 단감은 동네 선배 형님 누나들의 서리 대상 1순위가 되어 수난을 많이 겪어야 했다. 부모님께서는 단감 하나 뚝 따서 잡수시는걸. 본적이 없었지만, 형제들은 학교에 갈 때나 소 먹이러 가면서 들랑날랑 따먹었다. 어머니는 제대로 익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다며 다 익기 전, 미리 앞당겨 따서 오일장에 내다 팔곤 했었다.

어린 시절엔 군것질용 간식거리는 겨울엔 고구마이며 여름엔 감이었다. 감은 대개 말복이 지난 후에라야 먹을 수 있다. 요새 사람들은 떫은 감을 어떻게 먹느냐 하지만, 어렵게 살았던 그때는 감이 사람들의 배고픔을 막아주는데 일조한 고마운 감이다. 풋감 때는 그냥은 먹을 수 없고, 단지나 항아리 같은 곳에 따뜻한 물을 붓고 담갔다가 2~3일 우린 후에 먹으면 떫은맛이 없어진다. 벼가 자라고 있는 논바닥에 2, 3일 파묻어 놓으면 떫은맛이 가시고 달게 우려졌다. 풀을 베기 위해 산에 오르고 내릴 때마다 훌륭한 간식거리가 되었었다.

요즘은 감나무 아래 떨어져 있는 풋감들은 쳐다보지를 않지만, 옛날에는 감 줍기 전쟁을 치러야 했다. 새벽잠을 설쳐가면서 아침 일찍 감을 주우러 참 많이도 다녔다. 말복이 지나고, 감이 굵어지고 비라도 오면 감 줍기 전쟁은 정말 뜨거워진다. 새벽까지 기다렸다가는 남들이 다 주워 가버리고 허탕을 친다. 날도 새기 전 일찍 새벽 3~4시쯤만 되면 단잠에 빠진 나를 아버지는 깨우셨다. 남 먼저 감을 주우러 나가지 못하면 하루 동안은 온 식구가 간식을 굶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둠에 감처럼 보여 손으로 집어 보면 개똥일 때도 있었다. 아침에 날 밝을 때 보면 흙덩이와 작은 돌멩이도 한두 개씩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추억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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