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철학의 추억 혹은 철학을 위한 청원서
아침을 열며-철학의 추억 혹은 철학을 위한 청원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1.17 14:2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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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철학의 추억 혹은 철학을 위한 청원서

우리 세대가 대학생이었던 1970년대, 그때는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이 이른바 교양의 기본으로서 아직 살아 있었다. 시대는 어수선했으나, 그것이 개인의 지성과 국가의 품격에 이바지했음을 나는 망설임 없이 인정한다. 여러 기회에 무수히 말한 바 있지만, 그것이 지금 거의 빈사상태다. 아니 어쩌면 사실상 뇌사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걱정이다. 철학의 언어가 사람들의 입과 귀를 떠난 그리고 가슴에서 사라진 지금 우리들의 삶의 세계(Lebenswelt, le monde veçu)는 과연 어떠한가. 얕음, 거침, 천박함…그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전파를 타고 이동하는 이른바 SNS의 언어들은 결코 인문학적 책의 언어들을 대체하지 못한다.

철학책이 젊은 청년들의 손에 들려 있던 시대로 잠시 돌아가 그 추억의 한 페이지를 펼쳐본다. 1990년대. 프랑스 현대철학이 우리의 지성계를 한동안 뜨겁게 달구었다.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으나 새롭게 부상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지식고고학과 해체주의가 프랑스철학에 그 연료를 제공했다.

횃불을 든 대표주자는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였다. 에피스테메니 권력이니 그리고 차연이니 에크리튀르니 하는 그들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소문났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의 철학은 저 데카르트와 베르크손의 2원론(정신·물체, 지능·직관, 정적·동적, 열린·닫힌)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른바 ‘68’ 이후의 큰 흐름을 계승하고 있었다. 문명·야만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던 레비스트로스, 숙주·기식자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던 세르, 거대·작은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던 리오타르…그들처럼 푸코는 정상·비정상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고, 데리다는 중심·주변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했다. 그런 공통점이 저들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그 구별로 해서 차별받고 배제되어 한쪽으로 내몰린 저 야만, 비정상, 기식자, 작은 것, 주변 등을 변호하고 복권하려는 강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었다.

다 좋았다. 박수쳐줄 일이었다. 그러나…그들이 놓치고 있던 부분이 있었다. 그들의 그 휴머니즘적-윤리적 노력이 결과적으로 오랜 세월 주류였던 다른 한쪽을 구석으로 내몰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른바 문명, 정상, 숙주, 거대한 것, 중심, 그런 것이다. 거기엔 저 위대한 ‘이성’도 포함된다. 그런 것들이 과연 피고석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단죄받고 감금되며 무대에서 퇴출당해야 하는 ‘유책자’인지, 그 점에 대해 우리는 진지한 재검토를 해봐야 하는 것이다.

그 추억의 페이지에서 나는 작금의 한국사회를 슬프게 떠올린다. 문사철의 언어가 싸잡아 그런 퇴출자의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지금 행세하고 있는 것들은 저 이른바 문명, 정상, 숙주, 거대한 것, 중심 들을 내쫓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야만, 비정상, 기식자, 작은 것, 주변 등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혹은 느끼고 있는 얕음, 거침, 천박함, 무질서…그런 것이다.
푸코 데리다 등등 횃불을 들었던 저 철학자들이 직접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저들은 그저 이미 싹이 텄던 그런 시대적 움직임을 철학적 지성으로 포착했을 따름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숭고한 휴머니즘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그러나 재검토는 필요하다. 아직 사약이 내려진 게 아니라면, 아직 목이 잘려 화장이 끝난 게 아니라면, 귀양 갔던 저 문명, 정상, 숙주, 거대한 것, 중심들에 대한 사면 복권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저들은 비록 죄과가 없지 않으나 다 나름의 공신들인 것이다. 이 그나마 살만한 근대세계를 연 개국공신들인 것이다.

‘철학’도 그 중 하나다. 철학은 궁극적 ‘좋음’을 지향하며 모든 시간과 공간을 전체적으로 통찰한다. 거대담론인 것이다. 그 최고 준봉들이 바로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가나다순)라고 나는 평가한다. ‘부처와 예수가 왜 철학의 준봉?’이라고 불교와 기독교에서는 흰 눈을 뜰지 모르지만, 잘 들여다보면 거기에 철학이 있다. 아니, 그런 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 즉 가치론인 것이다. 철학과의 커리큘럼에는 엄연히 불교철학이 있고 기독교철학이 있다. 나도 최근에 그 핵심을 논하는 책을 두 권 써서 시장에 내보냈다. 공자도 부처도 예수도 다 거대담론 중의 거대담론이다. 이 거대함의 무게가 혹 사람들에게 부담을 줬을지는 모르나 그건 퇴출에 해당하는 중죄가 아니다. 오히려 최고선이며 필요선이다. 하여 나는 그들의 사면과 복권을 청원한다. 이것은 대통령이나 청와대에 하는 청원이 아니라 국민들과 이 시대에게 하는 청원이다. 부디 이 청원이 동조를 얻고 진지하게 고려되어 작은 일부나마 받아들여지기를 학수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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