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논개(論介)님은 진주 기생이다
진주성-논개(論介)님은 진주 기생이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1.20 14:3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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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논개(論介)님은 진주 기생이다.

논개님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천한 기생으로 충성심을 지니고 있어 왜장을 물리쳤다고 기록되어있다.

<승정원 일기>영조 2년(1726)에는 관기와 진주 관기로 기록되었다. 논개님이 순국하신 후 인조7년(1629)에 순국 장소인 남강 바위에 의암이란 글자를 새기게 되었고 경종2년(1740)에는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했다.

논개에 대하여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 순조 때(1832) 편찬된 <진주목읍지> 고종 때(1832) 편찬된 <진양지>등에도 진주관기(官妓)로 분명히 기재됐다.

의기 논개에 대하여 맨 처음 소개한 유몽인(1559~1623년)이 저술한 <어유야담>에도 진주 관기로 기재됐다.

그러므로 논개를 누구 부인이라 함은 견공의 소리에 불과하다. 우병사 최진한은 논개의 포상 문제를 조정에 계청하게 되었고 곧 이어 경종 때 예조로 하여금 면밀히 검토해 급복의 특전 여부를 거행토록 하라고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 이 때 논개가 의기(의로운 기생)로 호칭하게 되었다.

영조 16년(1740)에 병사 남덕하(1688~1742)에 의해 의기 정려를 계청하였고 왕의 윤허를 거쳐 의기사를 창건케 되었고 순조 때 목사 홍백순은 새로 세우게 된다.

부사 성여신(1546~1623)에 시작해 1623년에 완성된 <진양지>를 보면 촉석루가 1593년에 병화로 불타 버린 것을 광해군 10년(1618)병사 남이흥이 중건했는데 웅장한 것이 이전과 비교해 배가 되었다는 것이다.

논개는 최모 장군의 부실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장군은 이미 3명의 부인이 있었고 장수 현감 당시(1577년)에는 논개가 4세 어린이였고 부친이 상중이라 새 부인, 새 부실을 맞이할 사회적 분위기도 아니었다.

논개와 관계 설정과 주장이 1960년대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 촉석루는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고 석문과 바닥 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전 순천대학교 오병무 교수는 <논개실기>에 기재된 신안 주씨에 대하여 확실치 않다고 했고 고려대학교 사학과 유중주 교수는 주씨 대동보에 논개 부친의 성명이 나오지 않아 주씨라는 주장은 거짓이라고 했다.

논개 의암 바위는 진주시가 앞서고 필자가 청원해 기념물 235호로 지정되었고 20여 년간 금식 투쟁, 서명받기, 신문 보도와 청원 등을 진행하였고 촉석루는 작년에 한 등급 높은 경남도 유형 문화재 666호로 지정되는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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