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빗물이 파낸 작은 흠들
시와 함께하는 세상-빗물이 파낸 작은 흠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1.27 15:4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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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빗물이 파낸 작은 흠들

비가 올 거라고 했고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당신은 우산을 착착 접은 뒤
사거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를 건널 것이다.

비가 올 것 같다는 말은
어쩐지 희미해

눈을 감으면
4층에서 1층까지
차례로 전등에 불이 들어온다

티스푼으로 뜬 것처럼
빗물이 파낸
작은 흠들이 길게 이어진다.

반지를 빼서 주머니에 넣는다
약지에
흰 띠가 남아있다.

(신미나, ‘연애’)

참 재미있는 내용이다. 이 시를 해석하긴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까, 불륜적인 내용이 살짝 비치면서도 귀여운 데가 있는 것이…아마 공간적으로 어떤 아파트의 4층의 집인 듯하고, 시간 적으로 저녁 무렵인 듯하다. 서정적 주인공은 신혼이 막 지나간 젊은 새댁으로 보이는데 상황을 추측해보면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다.

갑자기 남편으로부터 야근으로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연락을 받고 기분이 몹시 상해져 있다. 오후부터 내림 비로 땅은 충분히 젖어있지만, 저녁 무렵까지도 날씨는 흐려 마음이 더욱 심드렁하다. 그래서 누군가와 따뜻한 커피라도 함께 마시고 싶은데, 마땅한 사람이 없다. 마침 얼마 전에 우연히 알게 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그 친구를 나오란다. 비는 그쳤지만, 또 올지도 모르니까 우산은 자기가 가져오겠단다. 하지만, 나는 나갈까 말까 망설여지고 그는 지금쯤 우산을 접고 막 신호등이 있는 건널목을 건너면서 성급하게 달려 올 것이라 상상한다.

진작에 비는 그쳤지만, 어쩌면 우산이란 존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은폐나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수단으로 변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왠지 지금 이후로부터는 비가 올 것 같지 않은 날씨로 보이기 때문이다.

망설임 끝에 나도 약속 장소로 나가는 상상을 하게 된다. 혹시 누군가에게 속마음이라도 들킬지도 모르니까 엘리베이터보다는 비교적 사람들의 눈에 덜 띄는 계단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4층에서부터 1층까지 복도의 감지 등은 불을 밝힐 것이고…

새댁은 빗물이 흐르면서 파낸 흠이 길게 이어진 것처럼 상상 속에서 이미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일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억지로라도 결혼반지를 빼서 주머니 속에 넣어보지만, 반지가 빠진 그곳에는 이미 반지가 있었던 흔적이 하얗게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가상적인 난감한 상황에서 결국 손가락에 남아 있는 흰띠가 현실 세계를 직시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미혼으로 위장하는 신부의 작은 일탈은 결국 성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시를 통해 추측해 본 것이지만, 이 난감한 연애는 결국 반지라고 하는 고리가 있어서 불발로 끝나게 된다.

반지라고 하는 것은 성인으로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증표이니, 그 증표를 쉽게 없앨 수가 있을까, 또한 없앤다고 하더라도 그 흔적이 남지 않겠는가. 물론 물질적으로 작은 반지에 불과하겠지만, 그 이면에 잠재하고 있는 남녀 간의 정이 비가 온 뒤에 짙은 빗물이 흐른 흔적이 남듯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있을 텐데, 쉽게 처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반지는 가운뎃손가락과 새끼손가락 사이에 있는 약지에 낀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즉 다른 손가락은 모두 혼자 세울 수 있지만, 약지는 혼자서는 세울 수 없는 유일한 손가락이다. 그것은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룰 때, 아내든 남편이든 혼자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가정이 아니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번 시의 내면을 추측해보자면, 신미나의 ‘연애’는 반지를 통해 부부간의 신뢰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메타포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에서는 잠깐이기는 하지만 마음속의 일탈에 대해서 배우자에게 미안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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