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지/지리산문화예술학교(지리산행복학교) 교무처장
신희지/지리산문화예술학교(지리산행복학교) 교무처장-나도 지리산에 산다시골에 사는 이들은 자연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인지 사람들은 내게 나무나 꽃의 이름을 자주 묻는다. 소위 글을 쓴다면서 산수유와 생강나무를 겨우 분별할 뿐, 매화가 피지 않을 때는 매화나무도 잘 알아보지 못하니 눈 뜬 장님이 따로 없다. 만물이 생기가 오르는 이맘때는 풀과 꽃, 나무들에게 미안하다. 그러나 뭐, 저희들도 내 이름을 모르지 않느냐고 엉뚱한 농담을 하고는 한다.
12년 만에 이원규 시인이 휴먼앤북스 출판사에서 포토에세이 <나는 지리산에 산다>를 냈다. 초고일 때 원고 교정을 살짝 보면서 미리 읽었는데 책으로 나오니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산뜻해서 요즘 한 장 한 장 새롭게 읽고 있다. 거기에 사진과 함께 우리의 야생화들이 나온다. 머릿속에 외워둘 만큼 총명하지 못한 나이지만 꽃을 보고 있자니 코로나블루가 좀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나도 지리산에 산다. 정확히는 지리산을 바라보고 산다. 지리산에만 사는가? 산 그림자를 품은 섬진강도 보고 산다. 지리산은 명산이고 큰 산이어서 사람들 마음속에도 산다.
나처럼 산을 오르지 못하면 홀로 글을 읽기에도 가장 좋은 때다. 돈 버는 경영수완을 말하는 이들도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말을 종종 하지 않는가! 이런 날이 마냥 가겠는가? 사람들의 삶은 바뀌어가겠지만 다시 생동한 날을 맞이하려면 이럴 때 준비를 해두어야 한다. 유튜브가 대세이고 모든 정보가 넘쳐나지만 실상 오래 남는 것은 실물이다. 경북의 보호수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들을 조사하는 프로젝트에 이원규 시인이 참여하면서 일부지역의 자료를 조사하는 일에 함께 했다.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기록은 비문(碑文)에 새겨있어 우리에게 1000년 전을 알려준다. 지금은 컴퓨터에 다 들어있으니 무슨 걱정이냐고 하겠지만 전기가 사라진다면, 슈퍼컴퓨터에 바이러스가 침투한다면, 우리가 저장해두고 천년만년 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모든 지식과 사실의 기록은 하루아침에 로그아웃 될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배터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책장에 꽂혀서 내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책이 실제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라는 거센 눈발 앞에 있다. 그 전에 따듯한 방을 기억하면 그 안에서 지낼 수 없는 날들이 힘들고 속상하고 화가 치밀기도 하지만 결국 늘 행복은 지금에 있고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흘려버렸다면 지금이라도 ‘그래, 이만만 해도 다행이야.’ 스스로 다독여야 하지 않을까!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우리에게 지리산이 말한다.
‘이 추운 겨울에도 피는 꽃들이 적지 않다고 매화, 동백, 복수초, 변산바람꽃, 어쩌다 눈이 오면 눈을 맞고 서서도 꽃은 지지 않는다고’ 입춘(立春)이 지나면 신축년(辛丑年)의 기운이 솟아오른다. 올해도 어려울 거라고 모두 예상한다. 기대를 갖지 않으면 실망하지 않으니 최소한 올해는 덜 망연자실할 것이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의 마지막 구절, ‘행여 견딜 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는 역설의 미학이다. 차라리, 제발 오시라! 오셔서 숨 쉬시기를!
저작권자 © 경남도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