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버지가 외롭다고 생각했는지
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버지가 외롭다고 생각했는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2.03 15:43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아버지가 외롭다고 생각했는지

아버지 가신 후로
아버지 따라나선 것들이 많다
꾸부정한 호미
이빨 무뎌진 톱
헐렁한 삽자루
언제 따라나섰는지 흔적 없다
또 있다
가족의 삶을 져 날랐던 지게
아버지가 외롭다고 생각했는지
지난해는 어머니까지 따라나섰다
따라나서지 못한 전답만
아버지 이마처럼 주름살 잔뜩한 채
잡초 덮어쓰고 비스듬히 누워있다
따라나서지 못하고 남은 것은
죄다 비스듬해졌다

(김윤현, ‘아버지 가신 이후’)

잊히거나 역사가 되는 것의 공통점은 과거라는 사실이다. 다른 점은 역사는 모두의 기억 속에 살아있지만, 잊혀가는 것은 형체는 물론 모두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역사는 의식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반면 잊혀가는 것은 일반적으로 특별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처음에는 아마 많이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묘약 같은 세월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았던 사건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 사건을 조금씩 씻어내고 만다. 아버지를 잊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버지의 주변을 잊게 한다. 이를테면 호미나 삽자루 같은 것에서, 모든 게 바쁘게 살다 보니 그렇게 잊게 되었다고 변명한다. 언제나 무거운 가족의 생계를 어깨 위에 지고 다녔던 지게마저도 잊게 될 즈음, 우리는 머쓱해진 마음으로 세월을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소스라친다. ‘아버지가 외롭다고 생각했는지/ 지난해는 어머니까지 따라나섰다’ 그즈음, 자식들로부터 잊혀가는 남편이 외로울 것 같아서 어느 날 어머니까지 이별하고 아버지 곁으로 가시게 된다. 세상 영원할 것 같았던 아버지 어머니의 흔적이 그렇게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떠나간단다. 그야말로 한 세대가 교차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과거를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하지만, 현실 세계가 힘겹고 고달플 때는 오래전의 추억을 생각하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옮겨지는 곳이 고향이다. 부모님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냥 귀소본능처럼 그냥 그곳으로 간다.

그곳에 가봐야 예전 가족은 없지만, 아버지 어머니의 이마에 주름살 같은 오래된 밭고랑이엔 영글었던 곡식은 하나도 없고 무심한 잡초만 가득하다. 어쩌면 그 잡초 밭 부근에는 부모님의 무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마음이 풀리고 고달픈 현실에서 단련되었던 세파를 더운 눈물로 씻어내면 속이 후련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날카로웠던 우리의 정서가 어느 정도 순화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를 잊었던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 가족사로 남아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가신 지 오래되었지만, 아버지의 이마에 주름살보다도 더 깊은 내 마음속에 아버지를 심고 있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손길이 없어서 황폐해진 밭과 논에서 잡초가 무성해져 있는 것을 보노라면, 누워있는 잡초만큼이나 마음 깊이 쌓여 있던 오래전의 기억들이 꾸불거리며 걸어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잡초가 무성하여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은 정상이지만, ‘죄다 비스듬해졌다’처럼 모든 것이 비스듬해졌다는 것은 당연히 고향 집을 비롯하여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도 무성하게 쌓여 있다는 의미의 은유이리라.

민족 대명절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요즘은 코로나 사태로 그나마 고향으로 명절이라는 이유로 한번 가 볼 수 있는 명분까지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역사인 고향 산천과 그 고향에서 땀을 흘리며 어린 우리를 길러주셨던 부모님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 다음 명절에는 꼭 고향엘 갈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