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선비가 본 일본, 사무라이가 본 조선
칼럼-선비가 본 일본, 사무라이가 본 조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2.15 14:5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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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남과학기술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선비가 본 일본, 사무라이가 본 조선

조선시대 선비가 가진 인식의 기본 틀은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화이관(華夷觀)이었다. 중국을 화(華)로 보고 성리학(性理學)의 이념을 구현한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로 보는 것을 기본으로 다른 나라를 이(夷)로 간주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이런 화이관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우선 15세기 말쯤에 성립된 화이관을 보면, 선비는 조선을 정치적으로 명나라의 제후국이고 문화면에서는 명과 같은 범주인 ‘화(華)’로 간주했다. 한편 일본과 여진(女眞) 등을 유교문화를 갖추지 않는 ‘이(夷)’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조선의 화이관은 문화상대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 시기는 조선에서 성리학 이외에 도교나 불교 등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풍토가 남아 있는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夷)’의 문화도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라고 인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숙주(申叔舟)가 쓴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는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간 경험을 토대로 했는데 문화상대주의 입장에서 일본 문물을 잘 전해주고 있다. 16세기에 접어들어 조선 성리학이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에 의해 확립되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조선의 대외관이 변화했다. 그것은 문화상대주의를 버리고 이적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즉 명나라는 중화이고 조선은 소중화, 일본은 이적이라는 세계관을 확립시킨 것이었다. 이황과 그의 제자 김성일이 이러한 세계관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김성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그가 일본을 보잘것없는 이적으로 경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러한 전통적인 일본 인식에 큰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바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다.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이 조선인의 대일본 인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때가지 일본에 대해 막연하게 이적, 왜구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조선인은 일본군의 잔인한 침략 행위로 일본이 잔인한 짐승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일본에 납치되어 약 3년 만에 돌아온 유학자 강항(姜沆)은 일본인을 침략자·학살자·잔인한 짐승·왜노 등으로 표현했다.

임진왜란 때 군인이었고 실학파의 효시로 평가되는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은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일본인을 ‘왜노’라고 불렀고 ‘이류(異類, 짐승)’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기술과 무기의 우수성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이수광은 강항보다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일본을 분석한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임진왜란 후의 17세기 조선 선비의 일본인에 대한 인식은 강항의 인식과 비슷했다. 일본인은‘잔인’하고‘목숨을 가볍게 여겨 살인을 좋아하는(輕生好殺)’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일반화되었다.

그들은 히데요시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만대에 걸쳐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만세원(萬世怨)’이라고도 불렀다. 임지왜란 이후의 조선 선비의 대일본 인식 변화를 볼 때 한국인이 미국 등 일본 이외의 나라를 이해할 때는 정치·군사·사회· 문화 등으로 구성된 국가의 전체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 대해서만은 유독 정상적인 이해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즉 일본에 의한 임진왜란과 일제 36년이라는 침략 사실 때문에 대립되는 일본관이 한국 안에서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반면 임진왜란 후 사무라이의 조선관의 흐름을 살펴보면 일본의 에도시대 전기(17세기 전반)는 조선 성리학과 학자에 대한 일본 학자의 존경과 믿음이 상당히 컸던 시기다. 그러나 조선과 중국은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었지만 일본 천황의 혈통은 한 번도 끊어진 적이 없으므로 일본은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가장 안정적인 나라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이야말로 진정한 아시아의 중심인 ‘중국(中國)’이라고 주장했다. 소위 일본을 아시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일본형 화이관(華夷觀)’이 형성되어 일본의 기세가 바다에 흘러넘칠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정치권에서 한일해저터널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친일 논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 되새겨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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