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섣달그믐 밤
세상사는 이야기-섣달그믐 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2.15 15: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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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자/시인
백숙자/시인-섣달그믐 밤

어릴 적에 할머니가 정성으로 치르시던 집안의 큰 행사가 있었다.

일 년 삼 백 예순다섯 날, 그 마지막 날 밤에 치루는 할머니의 신앙이며 집안의 성스러운 의식,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밤, 지나가는 날과 다가오는 미래의 날이 교차하는 순간, 더욱 정성을 다해 보내고 맞이하는 할머니, 식구들이 무탈하게 또 건강하게 지낸 것도 여러 조상님과 천지간 모든 신들이 지켜준 덕분이라 믿으셨다. 그 음덕에 보답하는 감사의 표시이자 새해에도 잘 부탁드린다는 간절한 기원이 담겨있다. 할머니는 특별히 아끼던 한지에 돌돌 말아 두었던 양초에 불을 붙여 촛대에 꽂아 안방과 마루에 놓으신다.

제사 때 아니면 볼 수 없는 귀한 양초다, 그믐밤은 불빛으로 집 안 구석구석이 호사를 누리는 시간이다. 대문 밖에는 호롱불을 대추나무 가지에 매달아 대문 안과 밖을 환희 밝히라고 이르시는 말씀. 들어오는 생명이나 나가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탈을 기원하는 지극하신 그 마음,
먹물 같은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작은 호롱 불빛도 만 리까지 비추는 것이라고 믿으시는 할머니, 나쁜 기운은 다 사라지고 복되고 좋은 기운만 찾아오라는 당부 시다.

혹, 길을 잃은 사람이 있거든 자기 집으로 잘 찾아가라는, 깊은 뜻도 숨어 있는 간곡함의 빛,
“이것만으로도 고맙지 탐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음이 가난해진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그런 마음에서 나오는 고마움과 감사의 답례, 먹물 같은 어둠의 정적은 더욱더 차갑다. 초가지붕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 하얀 뿔같이 사방을 밝히고 있다. 어둠이 짙을수록 더 하얗게 빛을 내는 고드름, 숨소리 빼놓고 모두 꽁꽁 얼어붙는 산골의 밤하늘에는 은하수가 강 상류처럼 고여 있는 듯 흐른다.

맞은편 능선에 짐승의 울음소리도 간간이 들린다. 어둠에 싸인 사방의 리듬들이 만든 고요는 더 없는 평온이다. 복실이는 할머니를 졸졸 졸 따라다니며 길잡이를 해주고 장독간도 불빛이 밝다. 특히 뒷간은 밝아야 한다고, 화장실에서 넘어져 병을 얻으면 오랫동안 고생을 한다고 믿으시기 때문이다.

고방은 밝아야 재물이 많이 쌓인다는 믿음이시고. 장독대는 장맛이 변치 말라는 당부이시니 소망, 참 많기도 하셨지. 할머니의 가슴 속은 수많은 소원이 들어 있는 하늘 주머니, 어찌 다 지니고 사셨을까, 하얀 피부 속에 간직하신 따뜻한 정, 그 마음으로 가족과 집안 가솔들을 두루두루 챙기시며 종부로서 주어진 환경에 순응해 사셨던 할머니셨다. 집안의 기둥인 장손은 할머니의 전부시다. 자신의 일신보다 더욱 아끼고 사랑하시며 염려하신다. 객지에서 공부하는 큰 오빠가 집에 오는 날은 가족 잔칫날이다. 할머니의 그 지극하신 정성으로 식구들이 배불리 먹고 쩔쩔 끓는 방에서 화애롭게 지내는 그 밤의 추억이 새롭다. 그믐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변해 버린다는 오빠의 말이 졸음이 와도 참고 견디라는 귀띔을 미리 해 주는 것이었는데 아는 듯 모르는 듯. 우리는 눈을 비비며 밤새워 놀았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오빠는 동생들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지 노래도 부르고 동화책도 읽어 주고 무서운 옛날이야기도 하며 초하루 새벽 먼동이 틀 때까지 이어졌다. 말만 해도 무조건 들어 주던 오빠가 있어 내 유년은 더없이 넉넉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또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오빠의 손을 잡고 따라다니던 시절, 그 속에 존재하던 식구들, 할머니 부모님, 큰오빠 작은 오빠 언니 동생, 행복했던 그믐밤의 풍경이다. 졸음을 참고 웃으며 보내던 그 밤이 더 새록새록 생각나는 날이다.

한평생 식구들의 무사 안녕만을 기원하셨던 할머니 무욕의 올곧은 삶, 나도 할머니 어머니를 따라 그믐밤은 집안에 불을 환히 밝힌다. 우리는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고 모두가 너의 덕분이라고 공을 돌리고 나누면서 오늘 이 풍요와 편리해진 환경에 무조건 만족하면 좋겠다. “이것만으로도 고맙지”우리 할머니의 말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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