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2.09.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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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숙/시인

지난 봄 우리 집 앞마당에 꽃밭을 만들었다. 장미가 심어진 기존 화단 벽 앞에다 굵은 통나무 세 개를 묶어서 눕힌 그 안을 흙으로 채우고 여기다 달맞이꽃 모종을 구해서 심었다. 밤에 피는 노란 꽃도 좋고 ‘기다림’이라는 꽃말도 좋고 꽃에 얽힌 신화도 재밌어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약용인 이 꽃씨를 받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올 여름 그 가뭄에 거의 매일 물을 줘야 했다. 맹물도 주고 쌀뜨물도 주고 EM(유용미생물)액을 섞어 주기도 했다. 이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꽂아 쫙 튼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어린 모종일 때는 바가지로 확 부을 수가 없어 정말 한 숟가락씩 떠먹이는 심정으로 물을 주며 키웠다. 수도 요금이 누진제라는 것을 알면서 EM액까지 사는 비용을 감수하며 이 고생을 사서 한 것은 키우는 맛도 있지만 꽃을 보고 씨를 받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군가가 꽃이 핀 가지를 꺾어가기 시작했다. 꽃이 약이 된다는 것을 아는 이의 소행 같았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는 마침내 참깨같이 씨앗을 맺으며 익어가는 꽃나무줄기들을 거의 다 잘라 갔다. 절단된 매끈한 단면을 보니 분명 손으로 꺾어 간 것이 아니라 꼭 커트칼날 자국 같았다. 외출 했다 돌아와서 이 황당함을 대면하는 순간 속이 뒤집혀 소화제부터 찾아야 했다.
이토록 흥분한 나를 보고 아이들과 남편이 뉴스에는 이보다 더한 일들도 많이 나오는데 그만 잊어버리라고 위로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머리와는 달리 가슴속에서는 계속 뜨거운 불덩어리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제 마당 꽃밭에도 CCTV를 달아야 하는 세상인가 생각하니 딱 잡히기만 하면 나도 그가 내 꽃들에게 한 대로 그대로 갚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생계와는 무관한 피는 꽃과 익어가는 꽃씨를 잃어도 마음이 이렇거늘 하물며 한 해의 소득원인 고추와 벼를 잃어버린 이들의 심정이야 오죽할 것인가!
그러나 지인들은 하나같이 요즘 성폭행과 묻지마 범죄 피해에 비하면 이는 아무 것도 아니니 그만 잊으라고들 한다. 이러니까 최근 관내 어느 마을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두고도 명색이 기관의 장이란 분이 “80대 노인이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20대 1급 장애인을 성폭행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정말 그 나이에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라며 마치 남의 일 말 하듯이 가십거리로 떠들 수 있는 것 아닌가!
더 무서운 것은 이 말을 듣는 이들 또한 “야, 어쩌면 그 나이에! 솔직히 남자로서 그 주인공이 너무 부럽다”, “역시 옛말이 맞네! 남자들은 짚단 한 단 들 힘만 있어도 담을 넘어간다더니” 등 이 사건을 대하는 대다수 남성들의 말초적인 1차 반응이다.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보도자료도 통제한다니 이런저런 말들이 많지만 그 말 어디에도 장애인인 피해자와 그 가족에 대한 동정이나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니 사회적 약자나 삼포세대(연애포기, 결혼포기, 자식포기)들은 누구 책 제목대로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말이 딱 맞다고 아우성이다. 국민소득과 평균 학력이 눈부시게 높아지고 학구열도 세계 최고인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이런 사회가 되었는가? 이 근본적인 원인이 뭘까? 일반 범부들은 5.16과 유신, 5.18과 12.12라는 현대사의 광풍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영령들은 감히 흠모하기도 버겁다손 치자. 그렇다면 최소한 남의 피땀의 대가인 농작물에다가 검은손이나 대며 살아서는 안 된다. 사회적 약자인 장애우나 영세농민들을 손잡고 일으켜주지는 못해도 짓밟고 짓이기는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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