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양반은 전 국민의 5% 미만
진주성-양반은 전 국민의 5% 미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2.17 13:5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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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양반은 전 국민의 5% 미만

서울대학교 이영훈 교수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양반 숫자가 5%라고 했다. 서기 1684년(숙종 10) 대구지방 호구단자에 의하면 양반 수가 5%이고 중인 수가 20%, 천민 수가 75%라고 조사됐다. 일제 총독부가 1910년 전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진짜 양반은 5%이내 라고 조사 발표한 사실이 있다.

김, 이, 박 대성만 계산해도 전 인구의 45%를 차지하는데 그렇다면 대성들도 양반 대열에 들지 못하고 80%가 양반이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적으로 농어촌에 가보면 4~6대 까지 벼슬을 하지 못한 이들이 90%가 넘는다. 조선시대 경국대전 등 법에 의하면 사, 농, 공, 상이라 하여 상업 계통에 종사하는 이들이 가장 낮은 신분이라고 했다. 즉 가장 낮은 신분에 속하면서 나는 양반이다. 왕족이라 주장하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1000여명이 모인 곳에 가서 자기가 양반이라고 생각하면 손을 들어보라 말하면 100% 손을 들고 자기가 상놈이라고 생각하면 손을 들어보라고 말하면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기생의 아들, 마당 새 아들, 첩의 소생, 환향녀 아들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한 명도 없는가 묻고 싶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생긴 자식들. 일본인과 바람피워 생긴 자식들은 어디로 가고 미군과 함께 낳은 자식은 어디로 갔나 매우 궁금한 일이다. 우리나라 최고 비석인 진흥왕 순수비. 점제현 신사비 등에 수많은 인명이 새겨져 있으나 성은 없고 이름만 나온다. 그러므로 신라. 백제. 고구려 평민들은 대부분 성이 없고 중국을 왕래하는 일부 귀족층에서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려 중기에 성이 없는자는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고 발표하자 비로소 성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고려 건국시 성을 하사했으나 성씨가 보편화된 것은 고려 중기로 보는 연구 논문이 있다.

그러므로 5000여 년간 성씨가 없이 지나간 세월이 많기 때문에 성씨로 양천(良賤)을 구분하는 것 자제가 모순이고 웃기는 얘기가 된다. 1910년 전후에 총독부가 인구를 조사하고 호적을 만들 때 성이 없는 자 즉 일부 소작인들, 고용자, 사노, 백정, 기생들은 자기가 본래 소속된 집안의 성을 붙여 신고토록 관보를 통해 발표했다.

진주의 경우 해방 이후 한국 전쟁 당시 진주시내 80% 이상이 파괴되고 촉석루, 시청, 군청, 법원, 교도소 등이 소실되면서 호적도 함께 소실되어 1955년부터 호적을 새로 신고 받아 만들 때 진주를 떠나 살면서 김, 이, 박 성씨가 흔한 성씨이기 때문에 본성을 버리고 대성으로 변경한 이들이 수 없이 많았다.

한국 전쟁 때 전쟁고아 50만명은 흔한 성씨 김, 이, 박을 붙이거나 고아원 원장 성을 붙여 사용, 신고했는데 최근에 성을 도용한 손자. 증손자들이 신라, 고려 시대 유명한 인물의 14세손 이라고 족보를 만들고 자랑하는 것을 보고 가짜가 진짜를 구축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KBS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 행사를 할 때 가족을 만나보니 김, 이, 박 성씨가 아니고 정씨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씨로 양반이라고 함은 웃기는 일이고 유명한 인물의 몇 세손이라 자랑하는 일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서기 1606년 산청군 호적에 보면 41%가 노비였고 1609년 울산 호적에 보면 47%가 노비였으니 우리나라 사람은 90%가 천민(노비)후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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