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고향 무정
세상사는 이야기-고향 무정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2.18 16:1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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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고향 무정

지난 설날에 시골 고향집엘 들렀다. 코로나19 대유행에 따른 국민행동수칙인 ‘5인 이상 사적모임 금지’ 때문에 혼자 조용히 다녀왔다. 3년 전 이맘때 하늘나라로 긴 여행을 떠나신 어머니의 삶의 손때가 묻은 텅 빈 시골 고향집은 오랜 세월 주인 없이 방치되어 폐가나 다름없는 모습에 울컥하며 내 어린 시절 겨울이 생각났다. 국화꽃은 이미 진 지 오래됐고, 아침이면 허옇게 서리가 내렸다.

그런 겨울이면 어머니는 쌀뜨물로 숭늉을 끓였다. 그때는 겨울날이 왜 그렇게 추운지 어머니 얼굴은 언제나 시퍼렇게 얼어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문풍지 떨리는 소리, 가랑잎이 바람에 쓸려가는 소리, 처마에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달빛이 쏴하게 쏟아지는 광경을 생각하면 으스스 소름이 돋아 한껏 이불 밑으로 파고들곤 했다. 그렇게 자식들에게 공을 들였건만 평생 고생만 하고 효도 한 번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하고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천장의 먼지가 낀 형광등에 겹쳐졌다. 나는 천장을 한참 올려다봤다. 그렇다고 눈물이 감춰지지 않았다. 집 앞 정자나무 두 그루. 삼백 수령 느티나무와 사백 수령 포구나무는 한여름 무성했던 잎 다 떨구고 앙상한 굵은 뼈로만 묵언정진하고 있건만...

내 시골 동네에는 팔십 여 가구가 산다. 사방으로 멀고 가까운 산이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어 손바닥을 안쪽으로 오므린 것처럼 오목한 곳에 앉은 동네다. 내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경남 김해시 한림면 안하 마을에서 나고 자라 평생을 산다. 외지로 나가 살던 분들도 별세를 하면 동네의 푸른 산으로 돌아와 영원히 잠든다. 밤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동이 트기도전에 다 알려지는 곳이요, 눈빛으로도 마음을 읽는 곳이요, 서로의 형편을 잘 알아 궁색한 집이 있으면 내 집의 사정을 뒤로 미루고 그 집을 먼저 도와준다.

논과 밭에 들밥이 나가면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논밭두렁에 모여앉아 밥을 나눠 먹는다. 저수지의 물을 괴고 흐르게 하는 일을 상의하고, 우물의 물을 사용한다. 크게 보아서는 한 식구나 다름이 없다. 요즘은 농사일이 바쁘지 않아 아직은 겨를이 있을 때여서 어른들은 마을회관에서 함께 점심과 저녁을 지어 드신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주무신다. 내 어릴 적에도 그랬고, 지금의 때에도 골목에서 서로 만나면 밥을 드셨느냐는 인사를 첫말로 주고받는다.

내 시골 동네에서는 설날이면 치르는 작은 행사가 있다. 합동 세배가 그것이다. 설날 점심 무렵이 되면 이장이 안내 방송을 한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마을회관으로 모여든다. 길게 줄지어 늘어서서 웃어른들께 세배를 올리고, 최고령인 노인회 회장님으로부터 새해 덕담을 청해 듣는다. 이장은 동네의 크고 작은 일들 가운데 진학이나 취업 등의 소식이 있으면 그 자리에 당사자가 참석해 축하를 받는다. 그러고는 음식들을 차려내 먹으면서 서로 얘기를 나눈다.

합동 세배에는 타지에 나가 살다 명절을 맞아 귀향한 사람들도 자리한다. 고향에 찾아온 사람의 손을 잡고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매일매일 골목과 들에서 만나는 사이일지라도 새해의 인사를 새롭게 나눈다. 또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비는 말을 나눈다.

내 시골 동네에서의 합동 세배의 전통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구순을 맞은 노인회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아주 예전에는 세배를 하러 집집이 직접 찾아다녔다고 한다. 노인회장님께서 결혼한 그 이듬해부턴가 합동 세배로 바뀌었다니 못해도 한 육십 여년은 족히 된 듯하다. 어쨌든 얼굴을 마주 대하고 정담을 나누는 이 행사는 요즘 시대에는 드문 일일 것인데, 나는 이 소박한 행사를 꽤 의미심장하게 생각한다. 마을 공동체를 이루며 생활하는 다른 사람이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를 거듭해서 묻고, 나의 친밀감을 겸손하게 드러내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속 깊이 빛처럼 품고 있는 사람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육십여 년 고향을 지킨 친구가 설날에 들려주는 소식은 코로나19로 인해 마을회관은 폐쇄 되고 명절 풍속도마저 바꿔버렸다며 우울한 표정이다. 지난 추석 때 ‘불효자는 옵니다’란 슬로건이 무색해졌다. 어느 건물 외벽엔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구요~ 우리 우리 설날은 내년이래요~’펼침막이 내걸렸다. 코로나19로 웃픈, 우스우면서도 슬픈 예가 한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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