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눈물이 흘러내렸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2.24 15:5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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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남자가
빗살무늬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빗살처럼 가느다란 흠집들이
비명을 지르며
세월을 참아낸다.

토기를 뒤집으면 흐르는 눈물

빗살이 가늘게 찢어놓은 세상에
내가 있다.

눈물이 난다
낡은 영사기가 삐걱대며
한없이 세월을 돌리고

가끔은
광장 서쪽에 있던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광장 동쪽으로 옮겨 가 있기도 했다.

토기를 뒤집으면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연, ‘빗살무늬토기에서 흐르는 눈물’)


시를 여러 번 읽어보면 처음에는 앞뒤가 연결이 잘 안 될 때가 있다. 특히, 모던(modern)시가 그러하다. 그럴 때면 마치 퍼즐을 맞추듯 의미를 분석하고 맞춰가다 보면 희한하게도 또 숨은 뜻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 허연의 ‘빗살무늬토기에서 흐르는 눈물’은 그런 면에서 재미있는 시로 보인다.

토기는 무덤 속에 있던 부장품임에 틀림없고 한 남자의 죽음에서부터 일이 시작된다. 작은 흠집이나 빗살은 당연히 오래된 토기를 의미하겠지만, 시인은 사자를 위해 함께 순장된 사람이 무덤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면서 남긴 손톱자국으로 생각하고 고통 속에서 울부짖던 눈물이 토기 속에 고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빗살처럼 가느다란 흠집들이/ 비명을 지르며//라고 하면서 한 남자의 등장에서부터 비롯되고 비명이라는 언어에서 죽음과 관련된 특히 타의에 의한 죽임을 당하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시 속에는 한 남자가 등장하고 토기가 보인다. 그리고 토기에는 빗살무늬 모양의 가느다란 흠집이 보이고 비명이 들린단다. 오랜 세월을 견뎌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고통의 흔적인 빗살무늬 앞에 시인이 서 있으면 그 오래전 남긴 그 순장자의 고통을 상상해 보면 시인도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 오래전 고통의 상징이 지금은 오래된 유물이 되어 여기저기로 순회 전시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냥 고대인이 남긴 유물로 생각하지만, 시인은 억울하게 죽어 간 눈물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

불가(佛家)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을 자주 한다. 말 그대로 눈으로 보이는 모든 현상은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달리 보인다는 의미로, 예쁘게 보이거나 혐오스럽게 보이기도 하며 추하게도 보인다는 것이다. 낡은 영사기가 삐걱대며 / 한없이 세월을 돌리고// 라는 장면에서 오래전 역사시대의 현장을 보여주고자 하는 서사적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을 때, 유구한 역사를 가진 토기를 통해 석기 시대의 토기와 현실적 유물인 상태의 토기가 의미하는 바가 다르듯, 토기의 흠이나 빗살무늬는 역사학자의 눈에는 오래된 세월의 역사적인 흐름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의 눈에는 아픔과 슬픔의 흔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학자의 냉철한 시각과 시인의 감성적인 사각이 여기에서부터 구별되는 순간이다. 시인의 눈을 빌려 고대 유물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볼 그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주게 하는 의미에서 볼 때 흥미성을 더해 주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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