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제2외국어
얼마 전 EBS뉴스를 통해 ‘제2외국어 고사 위기’라는 소식을 접했다. ‘내년이 되면 서울에 남는 프랑스어 정규교사는 단 한 명뿐’이라니 ‘고사 위기’라는 말도 과장이 아니다. 독일어도 아마 비슷한 사정일 것이다. 중국어와 일본어, 특히 중국어는 사정이 좀 나은 모양이다. 중일이 우리의 바로 이웃이고 강국임을 생각하면 중일 편중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독어와 불어가 우리 곁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별문제다.
우리 세대(50년대생, 70년대 학번)가 고등학생이었던 70년대 초는 거의 대부분의 학교에서 독어와 불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쳤다. 선생님에게 꿀밤을 맞아가면서 ‘der, des dem, den…’을 외우던 아련한 추억이 있다. 2학년 때는 어설픈 실력으로 다짜고짜 ‘황태자의 첫사랑(Die Geschichte von alt Heidelberg)’을 독일어 원문으로 읽기도 했다. 내가 훗날 교수가 된 후, 모처럼의 연구년을 하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보내게 된 데는 그 시절 읽었던 그 소설이 크게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소설이 배경이 하이델베르크였다. 꼭 로맨틱 가도를 가지 않더라도 우리 세대에게는 독일 그 자체가 곧 낭만이었고 꿈이었다. 헤세, 괴테, 칸트, 헤겔, 베토벤, 슈베르트...아니, 데미안, 싱클레어, 베르테르, 로테...그런 이름들이 우리에게 홍길동이나 춘향이 못지않게 친근했던 것은 고등학교에서의 독일어 교육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불어를 선택한 친구들은 잘난 척 ‘세 라 비’(이것이 삶이다)니 ‘끄 세 즈’(나는 무엇을 아는가)니 ‘즈 빵세, 동끄 즈 스위’(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니 하는 말을 입에 담았고, 설레며 쓴 연애편지의 끝줄에는 ‘즈 뗌므’(너를 사랑해)를 하트와 함께 써넣기도 했다. 모르긴 해도 윤정희나 정명훈이나 홍세화 같은 분들이 프랑스에서 삶의 일부를 보낸 것도 프랑스어 교육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저들을 멀리한다면 저들도 우리에게 거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지만 나는 일본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를 비교해본다. 나는 일본에서 20대와 30대의 10년을 살았다. 일본은 저 근대 초, ‘탈아입구’(脫亞入歐,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들어가자)를 외친 후쿠자와 유키치 이래 스스로를 유럽의 일부로 자처했고 그것이 일본의 발전을 견인했다. 유럽, 특히 독일과 프랑스에 대한 저들의 관심은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유럽의 관심과 애정으로 화답 받았다. 평가와 인정도 뒤따랐다. 유럽여행을 했거나 거기서 살아본 사람들은 아마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일본에 대한 저들의 호의와 평가가 어떠한지를.
유럽철학, 특히 독일철학을 전공한 나는 저들의 위력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안다. 그것은 2000 수백 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유럽은 오늘날 세계를 호령하는 미국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런 전통은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하루 이틀에 사라질 것도 아니다.
우리가 저들을 멀리하는 것은 푸대접이다. 그러면 저들도 우리를 멀리할 수밖에 없다. 그게 이치고 인지상정이다. 잃고 난 후에 후회해본들 이미 늦다. 미국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편중을 보완하기 위한 균형으로서도 우리는 유럽을 우리 곁에 머물게 할 필요가 있다. 제2외국어는 그런 우호적 관계의 한 상징이다. 고등학교의 교실에서 다시 ‘der, des, dem, den...’과 ‘Mon, ma, mes; ton, ta, tes; son, sa, ses’라는 소리가 들려오기를 기대한다. 교육부 장관께 이 글이 가닿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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