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손바닥 위에 너를 올려놓고
시와 함께하는 세상-손바닥 위에 너를 올려놓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3.03 15:0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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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손바닥 위에 너를 올려놓고

멸치의 파동이여,
시간의 방부제가 첨가된
별의 찌꺼기여,
본질적으로 만만한 술안주여,
너는 약간 맛이 간
내 애인의 입술보다 짭짤하다.
심하게 녹이 슨 기타 줄을 뜯는
내 손톱보다 가늘고 길다.
한때 바다를 헤엄쳤을 부드러운 멸치여,
너는 지금 딱딱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잘게 부서져 순식간에 가루가 된다.
손바닥 위에 너를 올려놓고
후-하고 불어
(원구식, ‘멸치2’)

이 시는 그냥 읽어버리면 절대로 안 되는 시(詩)다. 많은 사유를 하게 하는 시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의미를 찾기 전에 먼저 서양 철학 한 가지를 소개해야겠다.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10진법이라 하면 0에서부터 9까지를 말하는데 0은 곧 무(無)를 의미하며 유(有)의 근원이기도 하다. 반대로 9는 유의 마지막이기 때문에 다음 단계인 무의 근원이자 곧 새로운 숫자의 시작(변곡점)이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유를 한번 경험한 영은 ‘일영(10)’ 그다음은 ‘이영(20)이라고 표시한다. 그러므로 모든 현상은 0에서 9까지 회전의 연속이며 생명체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원리는 끝이 아닌 순환의 영속으로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과도 일치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피타고라스도 윤회사상을 신봉했다. 실제로 피타고라스는 그의 제자들에게 윤회를 가르치면서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용한 옷이나 이불은 모두 백색을 고집했는데, 이유는 염료를 사용하게 되면 다른 생명을 희생해야만 되기 때문에 불필요한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그야말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서양판 불교사상으로 볼 수 있다.

원구식 시인의 멸치라는 이 시는 바로 피타고라스의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하는 이론을 바탕으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멸치의 파동이여(바다속의 멸치=생(生)=1) / 시간의 방부제가 첨가된(햇빛에 말리는 멸치=9) / 별의 찌꺼기여(무=0)가 되는 것이다. 한때 바다를 헤엄쳤을 부드러운 멸치여,(생=1) / 너는 지금 딱딱하다.(사=9) / 조금만 힘을 줘도 / 잘게 부서져 순식간에 가루가 된다. (무=0) 이러한 원리를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은 변증법이라는 논리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기존의 진리(正)가 일정 시간이 흐르면서 반론(反)이 제기되고 이후 기존의 원리와 반론의 타협(合)은 새로운 진리가 탄생(合=새로운 正)하게 된다는 논리다. 그러니까 멸치의 파동(정)은→별의 찌꺼기가 되어(반)→애인의 입술보다 짭짤한 술안주(합)가 된다는 논리다.

복잡하게 설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두고 불가(佛家)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하여, 세상 모든 만물은 한번 탄생하게 되면(1) 영원한 것이 없어서 조금씩 변화(9)를 거쳐 소멸(0)하였다가 다시 새로운 존재(1)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또 그 새로운 것은 다시 변화를 거쳐 소멸과 탄생으로 반복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불가의 윤회사상이 되는 것으로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만물은 수(數)라는 논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에 진리라는 것이 가는 길은 달라도 이렇듯 지향하는 바는 한곳 즉 최고의 진리가 되는 것이니 얼마나 재미있는가. 원구식 시인의 멸치라는 시를 두고 이렇듯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 한 편의 시가 주는 소중함이 여실히 증명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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