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서영식씨 ‘지리산이 품고, 지리산을 품은 삶의 여정’
故서영식씨 ‘지리산이 품고, 지리산을 품은 삶의 여정’
  • 양성범기자
  • 승인 2021.03.04 17:23
  • 16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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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함께한 평생의 삶, 역사로 남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모형도 제작 결심…자필 자료집도 2권 남겨
1953년부터 2000여회 입산 1973년 자료집 완성 20년 인고의 세월
유족 지난달 25일 지리산국립공원공단에 기증 영구보존 전시키로
▲ 천왕봉에 오른 서영식씨.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발길~ 지나온 자욱 마다 눈물 고였네~~”


1954년 4월 故서영식 씨는 평소처럼 애창하던 유행가 ‘나그네 설움’을 흥얼거리며 집을 나섰다고 유족들은 기억했다. 그렇게 집을 나선 故서영식 씨는 짧게는 보름 남짓을 길게는 3달가량 만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리곤 곧바로 방에 틀어박혀 모아온 지리산에 관한 자료들을 정리했다.

지난달 25일 故서영식 씨 유족들이 지리산국립공원공단에 기증한 자료집에는 1950년대부터 1970년의 지리산의 식생, 사찰, 계곡, 구전(傳說)이야기 등을 담은 다양한 내용과 흑백·컬러 인화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야별로 분류된 자료가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지리산의 역사를 나타내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자료집에는 당시 등산 코스별 거리와 지리산 화전민들의 삶 그리고 지리산의 사계가 잘 묘사되어 남겨져 있다.

여름에 지리산을 찾은 서영식씨.
여름에 지리산을 찾은 서영식씨.

◆어머니의 품 지리산, 삶이 되다
지리산은 높이 1915.4m로 남한에서 2번째로 높은 산이다. 행정구역상 전라도, 경상남도에 걸쳐 있다. 방장산, 두류산, 삼신산이라고도 한다. 국립공원 제1호로 규모가 국내에서 가장 크다. 8·15해방부터 6·25전쟁을 거치면서 삼림에 큰 피해를 입었으나, 비교적 원시 상태의 자연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한제국 말에 동학교도들이 피난하여 살았으며, 여순반란사건 후 좌익세력 일부가 머물렀고 6·25전쟁 때는 북한군의 패잔병이 거점으로 삼기도 했다. 오늘날 각종 민족종교의 집산지가 되고 있다.

지리산은 불교문화의 요람지로서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 쌍계사 등에 국보급·보물급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노고단, 피아골, 반야봉, 세석, 불일폭포, 벽소령, 연하봉, 천왕봉, 섬진강, 칠선계곡의 절경이 지리 10경으로 유명하다.

지리산은 故서영식 씨의 그리움이었고, 목적이었고 삶이었다. 그의 삶 속에는 언제나 지리산이 있었다. 故서영식 씨는 1938년 지리산이 품은 시천면에서 태어났다. 세상을 향해 눈을 뜨니 지리산이 펼쳐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년 시절 지리산자락을 앞마당처럼 놀러 다녔다. 그에게는 지리산이 어머니였고 놀이터였고 또 선생이었다. 결혼 후 산청읍으로 거처를 옮기고도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은 늘 한결같았다.

지리산을 찾은 서영식씨.
지리산을 찾은 서영식씨.

◆걷다 보니 봄·여름·가을·겨울 지리산의 사계(四季)
걷다 보니 봄이 있었고 여름을 만났고 가을을 지나 겨울을 맞이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지리산은 故서영식 씨의 호기심을 담은 그리움이었고, 청춘이었고, 열정이었다. 당시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할 수 없었던, 또 지리산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없었더라면 쉬이 할 수 없었던 그 어려운 일들을 故서영식 씨는 해냈다.


그렇게 20여 년간을 모아온 지리산의 자료를 토대로 故서영식 씨는 지리산 모형을 만들기 시작한다. 지리산 모형(3300×2700mm)은 1972년에 故서영식 씨가 직접 종이를 한 장씩 겹쳐 약 8개월간 제작한 것으로, 지리산 전역 60여 개 봉우리를 비롯한 계곡 등이 입체지형(등고선 간격 10m) 형태로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당시 유족들은 몇 날을 손수레로 종이를 실어 왔다고 회고했다. 아마도 종이의 분량은 수십 대의 손수레 분량이 족히 될 거라고 전했다. 그렇게 8개월을 밤낮으로 만들어서 완성된 모형도를 故서영식 씨는 1974년에 산청군에 기증을 하게 된다. 당시를 회고하는 사람들은 모형도의 완성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의 모습을 담고 있는 지리산 전문가 김수덕(68·단성면)씨는 지리산 총집을 접하고는 감격했다. 그는 “당시의 지리산이 그냥 눈앞에 펼쳐져 있다. 예전 사진 자료를 찾으려 해도 쉽지 않았는데, 아주 세밀하고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며 “나도 지리산이 좋아 지난 수십 년을 지리산을 다니면서 기록물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 지리산 총집은 가히 지리산에 관해서는 최고의 가이드북이다”고 평가했다.

지리산 모형도.
지리산 모형도.

◆지리산과 함께한 청춘 20년, 그 후 50년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던 지리산에 관한 전설들은 청년 서영식을 지리산으로 이끌었다. 청년 서영식은 호기심과 지리산에 대한 열정으로 한국전쟁이 끝나고 지리산 공비토벌 후, 곧바로 지리산으로 향했다. 청년 서영식은 산청 함양 등 경남지역에 분포된 지리산뿐만 아니라 전라남북도를 비롯하여, 3개 도에 걸쳐진 지리산을 두루 다녔다.
청년 서영식은 다니면서 이름 없는 계곡과 폭포에 청년 서영식은 후세의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또 당시 정비되지 않았던 등반코스별로 거리를 표기하고 계곡과 장소마다 전해오는 전설을 수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당시에 GPS 등 거리를 측정할 수 있는 장비는 전무(全無)했을 것인데 당시에 기록된 거리와 현재 첨단 장비를 통해 측정된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

청년 서영식의 지리산과 함께한 20년은 1973년 ‘지리산 총집(總集)’으로 완성된다. 故서영식 씨가 완성한 ‘지리산총집’에는 지리산 화전민들의 삶이 담겨있었고 지리산의 동물이 담겨져 있었고 생태계가 고스라니 담겨있다. 총집을 완성한 故서영식 씨는 종이를 한 장씩 붙여서 지리산 모형도를 만든다. 만든 모형도가 널리 많은 이들에게 지리산을 알리기 위해 활용되기를 갈망하는 서영식씨는 그 모형도를 이듬해 산청군에 기증하여 당시 산청군 중앙현관에 지난 2019년까지 50여 년간을 산청군과 함께했다.

문창대에서 바라본 천왕봉.
문창대에서 바라본 천왕봉.
지리산 반야봉.
지리산 반야봉.

◆지리산총집(智異山總集), 모형도와 함께 부활(復活) 탐방객들의 빛이 되다
지난 2019년 故서영식 씨의 유족들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사건을 만나게 된다. 모형도에 대한 가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산청군청으로부터 중앙현관 리모델링 사업으로 인해 모형도를 거둬 가든지 아니면 폐기하겠다는 통보를 받는다. 지리산에 관한 자료로서는 전국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선친의 삶과 혼이 담긴 모형도의 폐기 소식에 유족들은 산청군의 처사에 망연자실하면서 모형도의 활용방안을 18개월이란 시간 동안 백방으로 찾게 된다. 그러던 중 모형도에 대해 정교함과 그 가치를 높이 산 지리산국립공원공단의 도움으로 모형도의 원상복구에 착수하고 모형도의 복사본을 만들어 지리산 화개탐방안내소에 전시하기에 이른다.

이에 故서영식 씨의 유족들은 고인이 20여 년간 지리산을 탐방하고 편찬한 ‘지리산총집’ 등 2권의 자필 자료집을 공개하고 지리산국립공원공단에 기증하게 된다. 모형도의 정교함과 사실적인 묘사에 극찬했던 지리산국립공원공단은 2권의 자료집을 접하고는 그동안 부족한 지리산 관련 역사자료에 감탄과 감동하며 고인의 뜻을 기려 자료의 디지털화를 거쳐 국립공원공단 홈페이지 역사관에 영구 전시를 결정했으며 자료집 원본도 모형도 옆에 나란히 전시를 결정했다.

故서영식 씨가 집필한 ‘지리산 총집’은 조정래의 장편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지리산 편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으며, 향후 지리산을 찾는 탐방객들의 역사가 되고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양성범기자

세석평원 일대의 모습.
세석평원 일대의 모습.
천왕봉 주변의 암석.
천왕봉 주변의 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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