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선택의 무게
아침을 열며-선택의 무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3.15 13:52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선택의 무게

한 시절, 전 세계의 지성을 대표했던 소위 실존주의가 우리 인간들에게 끼친 영향은 작지 않다. 그 첨병이었던 사르트르의 철학에 ‘선택’(choix)이라는 개념이 있다. 거두절미하고 아주 쉽게 말하면 인간의 실존은 간단없는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여기엔 자유와 책임이라는 개념도 얽혀 있다. 키에게고가 말한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한 ‘기투’(Entwurf) 같은 것도 이 개념에 녹아들어 있다.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따분한 철학강의가 되니 생략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렇다. 우리는 살면서 거의 매순간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A냐 B냐 하는 선택도 있고, A냐 비(非)A냐 하는 선택도 있다. 어떤 유형이든 쉽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다. 이게 쉽지 않고 간단치 않기 때문에 소위 ‘결정 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게 예를 들어 점심에 짜장면을 먹을 것인가 짬뽕을 먹을 것인가, 여름휴가 때 산으로 갈까 바다로 갈까, 노란색 원피스를 입을 것인가 갈색 바지를 입을까, 하는 정도라면 별일도 아닐지 모르겠지만, 경우에 따라 이게 원서를 A대학에 넣을까 B대학에 넣을까, A회사에 넣을까 B회사에 넣을까, A랑 결혼할까 B랑 결혼할까, A동네로 이사 갈까 B동네로 이사 갈까, 하는 종류라면 그 선택이 절대 간단하지 않다. 그 결과가 ‘그 이후’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예컨대 신혼 초, 아직 저렴했던 강남아파트로 이사 가자는 아내의 말을 묵살하고 한적한 교외의 주택을 선택했다가 평생 집값으로 다투던 늙은 부부가 나이 들어 끝내 이혼에 이르렀다는 뉴스도 우리는 접한 적이 있다) 그런 게 인생이다. 그래서 이 선택이라는 게 어렵고 심지어 철학의 주제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실존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건 사회적 행위, 국가적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를테면. 저 피고인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할 것인가 실형을 선고할 것인가, A당에 투표할 것인가 B당에 투표할 것인가, 자유무역을 할 것인가 보호무역을 할 것인가, 전쟁을 할 것인가 화친을 할 것인가, 이런 선택이라면 국가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한다. 선택이란 그렇게 무거운 것이다. 베트남파병을 선택한 한국 대통령도 이런 무게를 느꼈을 것이고, 천안문 진압을 결정한 중국 수뇌부도 이런 무게를 느꼈을 것이고, 브렉시트를 선택한 영국 수상도 이런 무게를 느꼈을 것이다. 사례를 열거하자면 거의 무한정이다.

선택지 혹은 갈림길 앞에 선 우리는 대개 Y자를 그린다. 이 글자는 우리에게 ‘벌어진 각도’를 보여준다. 그게 단 1도의 차이라 해도 벌어진 그 각도는 갈수록 커진다. 그게 우주공간이라면 그 1도의 차이가 이윽고 지구와 화성보다도 더 멀어지고 태양계와 안드로메다보다도 더 멀어진다. 우리가 어느 쪽인가를 선택할 때, 오른쪽 혹은 왼쪽 어느 하나는 그 선택에 의해 버려진다. 선택 이후는 이미 Y자가 아닌 것이다. 엄청나게 다른 어느 한쪽만이 현실로서 남는다. 그래서 모든 선택과 결정은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때 그것을 알았더라면’ 하는 어느 시집의 멋진 제목도 실은 이런 실존주의적 고뇌를 그 배경에 깔고 있다. ‘나(그때로) 다시 돌아갈래’ 라는 영화의 대사도 결국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류의 모든 작품들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다시 되돌아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는 엄정한 사실이다. 선택이라는 실존적 행위는 연필로 그리는 스케치가 아니라 덧칠밖에는 길이 없는 유화 같은 것이다.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수채화 같은 것이다. 유화는 그나마 덧칠로 가릴 수라도 있지만, 수채화는 그것조차도 불가능하다. ‘다시’라는 게 없다.

2021년,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Y자 앞에 있다.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어느 한쪽엔 낭떠러지 혹은 폭포가 있고 어느 한쪽엔 무릉도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여간에 우리는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직장에서 보직을 맡아 일하다 보니 연일 회의다. 누군가가 연일 의사봉을 두드린다. 그런데 그 의사봉이 과연 ‘그 이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무게를 느끼고 있는지 마음이 쓰인다. 입법-사법-행정 등의 국가적 결정들은 더욱 그렇다. 그 선택과 결정의 무게를 사람들이 좀 제대로 느꼈으면 좋겠다. 뒷산의 저 육중한 바위 봉우리처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