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지구를 돌리고 있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지구를 돌리고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3.17 10:2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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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지구를 돌리고 있다


연둣빛 덩어리는 갈참나무 위에
붙어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자리를 옮길 때마다
몸이 아주 조금씩
출렁였다

박각시나방 애벌레는
늦은 시월의 죽엽산에서 갈참나무 아래를 향해
구물구물

지구를 돌리고 있다
소나무 서어나무 떡갈나무가 나란히 쓰러져
산길을 막고 있는

가을 산,
박각시나방 애벌레 혼자
칼칼한 연둣빛이다

길은 반대 방향이다

조용미, ‘연둣빛 덩어리’

우리가 사는 인간 세상은 3차원이라고 한다. 3차원의 세상에서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배를 타고 다닌다, 심지어는 비행기를 타고 대륙 간을 이동한다는 것에 대해서 경이로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4차원의 세계가 있다면, 그래서 그 4차원의 세상에서 사는 어떤 생명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여기 박각시나방 애벌레가 시월의 어느 늦은 날, 지난여름에 태풍으로 쓰러져 있는 떡갈나무 갈참나무 껍질 위로 기어 다니고 있다. 이 박각시나방 애벌레는 여기 쓰러져 있는 나무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 전부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다니는 등산로 변에 쓰러져 있는 나무는 작고 하찮은 세상으로 인간에게는 오히려 귀찮은 존재이다. 그러나 그 별 볼 일 없다고 여기는 곳을 세상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는 박각시나방 애벌레를 볼 때, 마치 인간을 바라보고 있을 4차원의 어떤 생명체와 같은 입장으로 본다면 무리일까.

박각시나방 애벌레는 애벌레치고는 비교적 크고 긴 형태에 초록빛을 가지고 있으며 머리 부분에 뾰족하고 긴 뿔을 가지고 있으며 시인이 //한마디 한마디 자리를 옮길 때마다/몸이 아주 조금씩/출렁였다//라고 했듯 연한 몸을 가지고 있어서 움직일 때마다 몸이 연하게 떨린다. 그런 애벌레가 지구를 돌린단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애벌레의 세계인 떡갈나무나 갈참나무들이 지구가 되어 자전을 해야 할 것이겠지만, 박각시나방 애벌레가 나무를 돌면서 지구(나무)의 자전을 대신 하는 것이다. 시상에서 가을 산이 말해주듯, 모든 생명이 막바지에 오르는 계절 그것은 생명의 절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시절일 것이다. 그런데도 머지않아 같은 운명이 될 박각시나방 애벌레는 전혀 그러한 시간에 개의치 않고 그 작고 부드러운 몸으로 현실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상상이 될 것이다.

시인은 박각시나방 애벌레의 그런 모습을 발견하고, 깊이 감동했을 것이다. 결승점에 다가갈수록 더더욱 겸허한 자세로 삶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 이 순간만큼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말했던 스피노자(Spinoza, Baruch)의 말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요즘 세상에는 삶은 치열한 데 비해, 한편에서는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다소 와해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것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현실에 적응을 잘하지 못하거나 지나친 경쟁의식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일 것이다. 그럴 때면 가끔은 우리도 박각시나방 애벌레의 이러한 삶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작은 애벌레일망정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조용미 시인의 <연둣빛 덩어리는> 무심히 지나치는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내면적으로 깊은 감명을 주는 시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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