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새순 예찬
세상사는 이야기-새순 예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3.21 14:2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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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자/시인
백숙자/시인-새순 예찬
 
꽁꽁 얼었던 땅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새싹들이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고 눈을 뜬다. 가만히 다가앉아 들여다본다. 꽁꽁 얼었던 지난 시간 동안 게으름 없이 해동하려고 꼬물거리며 물을 빨아올렸던 뿌리의 위력이 숭고하다. 마당에 서면 반겨주는 내 작은 화단, 예서 제서 숨바꼭질하는 듯 쏙쏙 얼굴을 내미는 생명, 내 집에 인연이 깊어 찾아왔을 테니 그 어찌, 반갑지 아니한가.

고맙기 그지없는 봄 손님이다. 그들의 동화된 마음이 내 마음 내부로  부터 전해지는 환희는 너무 크고 충만하다. 가끔 찾아오는 원인 모를 무력감을 일깨우고 용기다 얻는다. 또 위로를 받으며 봄 나무뿌리 같은 난국을 헤쳐 가는 그대들 덕분이라며 저절로 고개 숙여지는 요즘이다.

흙으로 다져진 땅의 표피를 뚫고 올라오는 힘찬 기운은 지치고 불안한 우리를 유순하게 기다리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생명은 고귀함의 결정체이다. 꽃눈을 감춘 씨알들이 사계의 안녕을 약속하는 듯 새뜻하고. 또 사랑한다는 신호의 연둣빛이다.

줄기와 잎은 태어나면서 이미 꽃눈을 잉태하고 있다. 모란은 작은 전구 알 만한 꽃 봉을 잎새 속에 숨긴 채 앙증스럽게 여물고 , 꽉 다문 입술 열리지 않는 가슴은 한층 도도해 보이는 것도 봄의 특권이다. 무시로 넘나드는 미풍에, 아침 이슬에, 한낮의 햇살에, 밤의 어둠에, 탄실한 속내를 채우며 한 뼘씩 키를 늘여 가리라.

할미꽃도 꽃눈을 간직하고 나리들도 저마다 초록 순을 보이고 나뭇가지는 눈물방울 같은 잎눈을 달고 우람한 잎사귀의 숲을 기다린다. 생명의 신비함이 넘치고 있다. 생명처럼 위대한 힘을 가진 것이 또 있으랴. 욕심 부리지 않고 상대를 탓할 줄 모르는 넉넉한 수용의 자세와 묵묵히 견디며 스스로 일어나는 어진 심성을, 우리도 네 탓 내 탓 아니하고, 서로에게 꼭 필요한 지렛대가 되면 어떠 하는지 오라고 부탁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돌아와 희망의 종을 울리는 고귀한 초록의 순. 순리에 따라 오고 가는 자연의 이치는 지치고 부대끼며 사는 우리에게 지혜를 주고 행복을 전달하는 반야의 텃밭이다. 또 그 앞에서 겸손함을 배우며 조금씩 양보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어진 심성도 익히는 것이리라.
 
다시 어머니를 그린다. 생전에 어머니께서는 자줏빛 모란을 복운의 꽂이라며 좋아하셨다.
자줏빛 비단 자락을 겹겹이 포개 입은 품격 있는 여인 같다고, 어머니 떠나가시고 모란이 우리 집으로 옮겨 온 지도 벌써 해가 되었다. 해마다 그 아름다운 자주색 꽃에 반하고 즐기며 행복한 순간을 어머니 보듯이 공손하게 대면한다. 가끔 눈빛을 보내며 나를 부르는 꽃봉오리. 조금씩 틈을 보이며 곁을 내어주는 모란, 참으로 더디게 피어서 애태우며 기도하게 하는 꽃이다.

꽃은 해마다 약속하지 않아도 잊지 말라고 찾아오는데, 꿈에도 한 번 오시지 않는 어머니가 오늘은 유난히 그립다. 가난한 종갓집의 종부로서 일생 억척같이 소임을 다하셨던 어른은 하늘 먼 먼 그곳에서 행복하신지 꿈에도 한번 안 찾아오신다. 따뜻한 햇살 때문일까 내 생명 안에 그리움이라는 촘촘한 문양을 짜게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한다.

자식으로서 추억의 실꾸리를 풀어내긴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것 같다. 비어있는 어머니 집에도 한 번 들여야겠다. 그곳 마당에도 뒤뜰에도 나를 기다리는 새순들이 고개를 쏘옥 내밀고 있을 테니까 나를 우쭐거리게 하는 해맑은 햇살과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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