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오래 비추던 불빛이 꺼지고
시와 함께하는 세상-오래 비추던 불빛이 꺼지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3.31 14:4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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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오래 비추던 불빛이 꺼지고

더는 떠돌지 않으리
구두에 흙 담고 꽃을 심어 대문 밖에 걸었지
섣부른 신발의 항해, 젖은 발과 타는 입술의 별자리들 따라
참을 수 없는 기항과 암초, 폭풍의 암전(暗轉)
오래 비추던 불빛이 꺼지고 지구는 한참 늙었어도
흙과 풀이 쌔근쌔근 잠자는 곳
나란히 걸린 뭉그러진 구두에서 작은 꽃 흥얼거리지
마르세유 삼백 년 된 계단과 좁은 골목길
그만, 뛰쳐나가지 마,
떠도는 이들에게 풀꽃 시간을 들여주려는 거야

정복선, ‘구두 화분 한 켤레’

짧은 시이지만, 굉장히 함축적이어서 방대한 내용을 최대한 압축하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는 각행마다의 메타포(metaphor) 하나하나에 숨겨진 본의(本意)를 파악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는 후반부에서 /마르세유 삼백 년 된 계단과 좁은 골목길/의 시적 배경으로 보아 시인이 프랑스를 여행하던 중 어느 골목길 계단에서 발견한 인상 깊은 상황을 시로 이끌어 나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시의 첫 행에서는 주체가 분명하지 않고 명제만 한 개가 던져져 있다. /떠돌지 않겠다/ 단다. 그럼 당연히 주체는 역마살에 걸린 것처럼 늘 떠돌아다니는 존재들이다. 그 존재는 다음 행에 등장한다. 구두이다. 구두란 사람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싣고 다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늘 떠돌아다녔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떠돌지 않겠다는 주체는 구두가 되는 것이다. 구두는 떠돌아다니는 것이 본성인데, 떠돌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구두로서의 생명이 끝났거나 업종 변경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구두에 흙을 담고 꽃을 심음으로써 이동의 도구가 아닌 식물을 심어두어야 하는 화분의 역할을 하는 업종 변경에 해당 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동이 아닌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동적 존재에서 정적 존재로 역할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구두는 마치 대양을 항해하는 배처럼 강을 건너다 발이 젖게 되기도 했고, 별자리를 바라보며 어두운 밤길도 걸어 봤기 때문에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어 본 존재이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길을 잘못 들기도 했고 암초에 부딪히기도 하여 평생을 고생 꽤나 한 셈이다. 그러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은 은근슬쩍(암전) 지금까지 구두가 겪었던 일상은 사라지고 다시 화분으로서의 역할이 시작되는 장면으로 오버랩(overlap) 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지구는 늙었음) 구두에는 사람의 발 대신 향긋한 흙과 예쁜 풀꽃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였고 비록 시간이 많이 흘러 찌그러진 구두일망정 흥얼거리며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다시는 계단이 높은 길이나 좁은 길로 다니면서 여유도 즐길 수 없는 팍팍한 삶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구두에는 아늑하고 평화로운 풀꽃의 시간만이 오래도록 남으리라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참으로 예쁜 시가 아닌가, 시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기교에 빠져 억지로 미사여구를 동원한다고 하여 훌륭한 시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짧은 시이기는 하지만 정복선의 ‘구두 화분 한 켤레’는 간결한듯하면서도 예쁘고 예쁜 듯하면서도 어딘가 다소의 기교가 살아있는 멋진 시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전성기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전성기를 꿈꾸는 중년의 삶에서 묻어나는 그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정복선은 중년의 여성이다. 누구나 이 나이에 들면 젊은 시절의 고생은 줄이고 치열한 삶보다는 소박한 여유와 멋을 찾는 시절이다. 당연히 찬사를 보내며 그간의 노고에 대한 위로가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시에서 말하는 구두라는 것이 결국은 이러한 제2의 인생기를 찾으려는 시인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해도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독자 제위께서도 아름다운 구두가 제2의 역할을 찾아가는 것을 아름답게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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