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몸은 사라지고 춤만 거기 남아서
시와 함께하는 세상-몸은 사라지고 춤만 거기 남아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4.14 14:59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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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몸은 사라지고 춤만 거기 남아서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다
울음 끝 곤한 잠에 취하다

한 사람의 생애는 웅크림으로 시작되는가
온몸이 오므라드는 고독
손가락 하나 펼 수가 없다

봉인된 사랑을 두리번거린 죄일까
꽃을 상상하는 동안
수천 번 눈물을 퍼 온 무늬가 온몸에 새겨진다
몸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춤이 천천히 발끝을 내민다

꽃향기가 반짝이는 순간,
단 한 번의 날갯짓을 위해
안간힘으로 몸을 비튼다

연못을 건너가는 노래들의 수런거림
오래 따르던 욕망의 길들이 흩어져 가는
풍경의 한 모서리에서
사랑이여, 얼마나 울었던가

그림자가 허공을 휘청이며 건너가
걸음만 남기고 사라진다
끝끝내 몸속에서 살던 춤은 몸 밖으로 나왔다
몸은 사라지고 춤만 거기 남아서
생의 가장 눈부신 날개를 햇살에 말리고 있다

(김수형,‘나비, 우화(羽化)를 꿈꾸다’)

제목이 ‘나비, 우화(羽化)를 꿈꾸다’로 되어 있는 이 시에는 ‘우봉 이매방’이라는 부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춤꾼 이매방 선생에 대한 이야기임을 밝힌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작품 중 꼭 집어 여기다 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에 소동파의 적벽부의 흔적이 다소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시상 속으로 불러들인 것은 분명 김수형 시인 자신도 소동파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목에서 우화를 꿈꾼다는 말에서 더욱 분명한 것 같다. 아니면 생전에 이매방 선생께서 ‘적벽가’를 창(唱)하실 때, 묻어 나온 정서가 은연중 시상 속에 묻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우화(羽化)라고 하는 말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른다는 말로 어원상 적벽부에서 “날개가 돋아서 신선(神仙)이 되어 오르는 것 같더라(羽化而登仙)”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선생의 타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시의 초장에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다/ 울음 끝 곤한 잠에 취하다/라는 어휘를 동원해 선생의 타개 소식에 슬퍼하는 메타포(metaphor)를 보면 더욱 의미가 분명해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표현은 시 전체의 후렴을 앞으로 당긴 것처럼 보는데, 만약 이 글이 산문이라면 이 부분은 맨 뒤에 와야 하겠지만, 시나 극작품(劇作品)에서는 긴장도를 높이기 위해서 간혹, 앞으로 불러들이는 경우가 있다. /생애는 웅크림으로 시작되는가 / 다시 손가락 하나 펼 수 없는/이라는 시어 통해 정리해보면, 시인은 탄생과 죽음의 방향이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러니까, 무에서 나와서(탄생) 다시 무로 가는(죽음) 과정이 우리의 인생이라고 볼 때, 시인이 생각하는 삶과 죽음의 과정이나 종착점은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반가(班家)에서 태어나 춤을 춘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시절 예술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과정(봉인된 사랑을 두리번거린 죄일까)과 평소 이매방 선생의 삶과 춤을 연마하는 과정(사랑이여, 얼마나 울었던가), 그리고 승천의 과정(끝끝내 몸속에서 살던 춤은 몸 밖으로 나왔다)을 비교적 전기식으로 잘 서술하면서 적절한 메타포를 활용하여 시적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결론은 이매방 선생의 죽음에 대한 추모 의식을 피력한 것이다.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그네의 퉁소 소리를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하는 듯, 여음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이 춤을 추고 외로운 배의 홀어미를 울릴레라’라고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이매방의 춤사위를 그대로 이입한 것으로 보이며, 이 모든 내용을 한 마디로 ‘나비의 날갯짓’이라는 시어를 동원하여 번잡한 언어를 정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김수형의 시를 통해서 이매방 선생의 일생과 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계기가 된 것 같아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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