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칼럼-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산다
도민칼럼-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산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4.20 13:3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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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석/합천수필가
이호석/합천수필가-나는 언제나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산다

얼마 전, 마당 끝에 꺼무칙칙하게 움츠려 서 있던 개나리 울타리가 제일 먼저 노란 꽃을 피우며 봄소식을 전하고, 집 앞·뒤뜰에서 봄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자두나무와 살구나무, 앵두나무가 개나리의 봄소식에 화들짝 놀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망울을 터트리더니 금세 꽃들은 자취를 감추고 연록의 푸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내가 태어난 곳은,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오리(五里)쯤 떨어진 합천읍 소재지였다. 세 살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가족은 조상 대대로 살아왔고, 가까운 일가친척들이 사는 이곳 농촌 마을로 피난을 왔다. 피난을 오고 집을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읍내 우리 집 일대가 폭격을 당해 집과 살림살이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그 여파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고, 우리 가족은 전쟁이 끝나도 돌아갈 집이 없어져 버렸다.

당시 우리 가족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들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우리 가족 모두가 폭격에 죽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피난을 나오지 않고 그곳에서 머뭇거렸다면 모두가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돕고 조상님이 돌봐 죽음을 피한 것 같다. 이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아버지는 지금 내가 사는 이 집터에 정말 어렵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이곳에 처음 지은 초가집은 마루도, 방문도 제대로 없는 너무나 초라한 집이었다. 몇 년이 흐르면서 집 모습이 제대로 갖추어졌다.

당시는 식량이 절대 부족한 보릿고개 시절이었고, 전쟁까지 치른 후라 농촌의 삶은 정말 어려웠다. 그런 환경에서 일가친척들의 도움과 강인한 아버지의 노력으로 우리 가족은 좌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다. 아버지의 강인함은 일제강점기 때 중국 만주로 가서 대농(大農)으로 살았고, 해방 직후 만주의 재산을 처리하기 위해 두 차례나 위험을 무릅쓰고 삼팔선을 몰래 왕래하면서 길러진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이 집에서 할머니와 부모님, 형제가 모두 함께 살았다. 군(軍) 복무기간과 공직을 시작한 후, 잠시 이곳을 떠나 살았지만 이내 이 마을에 집을 지어 살다가 이 집터로 들어왔으니 한평생을 여기서 사는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부터 추억을 만들어 가며 산다. 그날그날의 생활이 바로 추억을 만드는 일이다. 가정의 큰 불상사가 아닌 웬만한 어려움은 지나고 보면 모두 아름다운 추억이 된다. 나는 지금까지 이 집에서 살면서 많은 추억을 만들어 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얼핏얼핏 떠오르는 추억들이 있다. 봄이면 앞·뒷산에 진달래가 만발하고 만물이 생동하는 자연이 너무 좋았고, 갖가지 농사 준비와 종달새가 노래하는 보리논·밭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김(잡초)을 매던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면 맨 먼저 닥치는 일이 보리 베기와 타작하는 일로 가장 고통스러웠다. 더위에 힘이 들기도 하지만, 땀이 저린 몸에 달라붙는 보리 가시랭이가 너무 성가시게 했다. 또 한여름의 저녁이면 마당 가운데 모깃불을 피워놓고 그 옆에 덕석을 깔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한다. 밥상을 치우고 나면, 나는 긴 담뱃대를 물고 부채질하는 할머니 옆에 드러누워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기도 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면, 오곡을 추수하는 즐거움과 함께 매우 바쁜 계절이다. 그중에도 벼 베기와 타작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벼를 베서 그 자리 늘어 말린 후 모두 작은 단(깻단)으로 묶어 등짐으로 옮겨야 하고, 타작도 발로 밟는 탈곡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닥치면 농사일은 좀 수월하지만, 인근의 산골짜기를 헤매며 땔감 나무를 해 다 날라야 하고, 매일 아침저녁이면 가족 같은 소(牛)에게 먹일 소죽을 끓여야 했다. 또 때로는 부모님이 가마니 짜는 일도 거들었다. 그래도 설 명절과 정월대보름, 2월 초하루 같은 즐거운 세시풍속이 있어 가장 행복한 계절이다.

나는 가끔 고향을 훌훌 떠나 객지로 나가 출세한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한 때도 있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고향에서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을 살았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부모 형제들과 내가 그동안 만들어 온 아름다운 추억이 어린 이 집에서 그 추억들과 함께 사는 것에 늘 행복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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