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4.21 16:00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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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출근하려고 골목길을 막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소리 들린다

“저어~ 너~, 한 삼십 만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말, 그 한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생 그 딸
“아버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대문 앞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그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정에 천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 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이영춘, ‘해, 저 붉은 얼굴’)

그 시절은 왜 그렇게 먹고사는 것이 힘들었던지, 아파트는 고사하고 남의 집 한쪽 방에 세 들어 살면서 아이들은 또 어떻게 키웠던지…그 와중에 우리 어머니들은 우릴 이만큼이라도 키워주셨다. 그러다가 더 가난한 생활을 하시던 어머니의 아버지들은 이집 저집에서 필요한 생활비를 빌려서 쓰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에게 빌릴 만큼 빌렸던 어머니의 아버지들은 마지막 선택을 한다. 출가한 도회지의 딸에게 돈을 빌리기로, 그러나 자식에게까지 돈을 빌리고자 한다는 것이 또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겠는가.

어렵게 딸네 집에 찾아와서 밤새 전전긍긍하다 마침내 출근하는 딸을 향해 어렵게 꺼낸 한마디 /“저어~ 너~, 한 삼십 만원 읎겠니?”/ 그 한마디를 하고는 아마 그 아버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철없는 그 딸 한마디로 /“아버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이었다.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오르는데 / 출근하려고 골목길을 막 돌아 나오는데/이라는 말에서 봤을 때, 철없던 시절의 시인은 가정과 직장을 병행하다 보니, 시간에 쪼들리기도 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니 미처 아버지의 민망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아버지에게 무심코 내 뺏었던 말이 일생의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전설 같은 그 과거사가 지금까지도 가슴을 휘어 파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태양은 세상만사는 물론 아버지와 딸의 관계까지도 분명하게 밝혀주는 공평무사한 존재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위치에서 딸에게 어렵게 돈을 빌리고자 하는 말하는 것이 매우 민망하였기에, 시인은 아버지가 해를 등지게 묘사하여 아버지의 민망한 표정을 은폐하려던 마음을 기술적으로 묘사하고 그 민망함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경솔하게 대꾸한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변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연의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이라는 시어를 네 번째 연에서 /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로 유사 반복한 것은 상황을 대비시키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의미를 심화시키는 맛이 있어서 뛰어난 기교를 확인할 수 있다.
/녹쓴 철대문 앞 골목길/은 /가난한 골목길/이 되어 70~80년대의 시대상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천근의 쇠못’이나 ‘붉은 강물’이라는 어휘를 동원함으로써 오히려 시인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설정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태양을 등지고 어렵게 말을 꺼냈던 그때 그 아버지를 생각해보라 당연히 지금의 이 아픈 가슴보다 훨씬 더 깊은 민망함이 묻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숨은 기교를 볼 때, 이번 시는 비교적 쉬운 표현인 듯하지만, 중후한 맛을 느끼게 해준 멋진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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