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은열사(殷烈祠)
진주성-은열사(殷烈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4.22 15: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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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동섭/진주문화유산원장·은열사 원임
심동섭/진주문화유산원장·은열사 원임-은열사(殷烈祠)

진주의 은열사는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장군을 모시고 유림이 향사하는 사우이다. 은열공 강민첨(?〜1021) 장군은 일찍이 진주향교 사교당에서 수학했으며 본관은 진주이고 고려 목종 때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으나, 거란과의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움으로써 오히려 장군으로 더 이름을 떨친 문무를 겸전한 선생이시다.

1012년(현종 3년)에 여진족이 영일, 청하 등지로 쳐들어오자 안찰사(按察使)로서 주군(州郡)의 군사들을 이끌고 이를 격퇴시켰다. 1018년에는 거란의 소배압의 대군을 강감찬 장군과 함께 홍화진에서 대파했다. 또한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쳐들어오는 거란의 군사를 자주에서 패퇴시켰다.

패배한 거란군이 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자, 이를 추격해 자주(지금의 평남 자산)에서 크게 이겼다. 이러한 공으로 공신의 반열에 올랐고,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이 되고, 이어 우산기상시가 돼 추성치리익대공신에 녹훈됐다. 1020년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고 태자태부에 추증되었으며,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다. 장군이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으며, 은열공(殷烈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그의 아들에게도 공신의 녹을 내렸다.

은열사는 1974년 12월28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장군의 위업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1980년대에 사당과 정문 그리고 재실 개경재(開慶齋)를 신축 정화했다. 은열사는 선생의 시호를 따서 이름 지었으며 사우 동편에 있는 부속건물 개경재 옆에는 유허비가 있다.

은열사의 석각은 963년(고려 광종14) 11월29일에 개경을 향하고 있는 당시 진주의 동쪽 옥봉산 아래에서 출생하였다는 문헌기록과 함께 장군의 탄생지를 알리는 금석문 자료로 강은열공유지(姜殷烈公遺址)라 새겨져 있다.

이러한 호국충절의 정신이 깃든 은열사는 매년 음력 3월11일이면 진주를 비롯한 산청 하동 사천 등 전국의 유림들이 장군의 호국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향례를 올리고 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한 위대한 정신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 맥을 면면히 이어 후세사람들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진주의 은열사는 선비유림이 매년 향사를 이어옴과 아울러 진주 강씨 문중의 후손들의 정성도 지극하다. 보통의 문중에서는 1년에 한 번 제사 모시는 것으로 예를 다하고 있지만, 은열공의 후손들은 매월 초하루 보름(朔望)이면 20여명의 후손들이 사당에 향을 사르고 선생을 추모하기를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그 선생에 그 후손들이라 은열공의 구국정신은 지난 1000년과 함께, 앞으로 1000년 2000년이 흘러도 유림과 후손들의 정성으로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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